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유교를 국교로 채택한 것은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통합을 위해 유교가 필요했기때문이며 기존의 불교나 다른 신앙체게보다 유교가 더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철학과 윤리관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중국 송나라 이후 성리학은 명나라를 통해 급속히 발전, 우리나라에 이 성리학은 고려 말 안향에 의해 소개되며 본시 성리학이란 불교의 초세간적 의식을 극복하고 중국 민족의 자존심 회복을 위해 만들어진 사상으로 고려 말 원 간섭기를 거치며 우리 민족 자존심 회복을 고심하던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쉽게 수용되었습니다.
본시 고려 시대때 불교는 국교, 유교는 정치철학으로 그 역할을 담당, 그래서 불교는 수신, 유교는 치국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고려 후기 수입된 성리학은 불교를 배척하는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으므로 유교가 불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처음으로 형성, 이런 시대 상황속에 고려의 문신 이색은 유불동고론을 제시, 성리학을 공부하면서도 불교에 배울점은 취해야 한다는 온건한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나 이색의 문하에 있던 정몽주는 그의 스승과 달리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 승려들의 무위도식하는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정몽주도 배불정책을 내세우지는 않았고 개인적으로 승려와 교류하는 등 온건적 입장에 있었습니다.
고려 말 문신 중 가장 극단적인 배불론자는 정도전으로 정도전 역시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와 수학했던 인물인데 고려 말 시대 상황을 인식하는 입장에서 두 사람은 다른 입장을 보입니다.
정도전은 고려 말 상황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며 새로운 질서 수립에 필요한 사상과 이념을 창출해야 한다는 진보적입장으로 그런 그에게 성리학은 고려의 오랜 사상이었던 불교를 정리하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제공할 매우 유용한 논리적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