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후전투에 파병된 조선군은 어떻게 되었나요?
임진왜란이후 상당수의 조총병이 양성되었는데 이 양성된 조총병이 대거 참전한 사르후전투에서 이 조총병을 비롯한 상당수의 조선군은 어떻게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군은 좌우영이 모두 궤멸했다고 합니다.
명나라군을 궤멸시킨 후금군은 재빠르게 명군의 후위에 있던 조선군으로 육박해왔고, 우영의 조선군은 진을 미처 다 치기도 전에 공격을 받아 전멸당했습니다. 좌영의 조선군은 말을 막는 장애물을 설치해놨었으나 후금군은 돌격하기 직전에 명군에게서 빼앗은 말들을 몰아보내서 장애물들을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수천 기에서 10,000기에 달하는 후금군 기병이 무방비 상태에 놓인 좌영을 급습했는데 좌영의 조선군 포수들이 거리를 재면서 사격전을 벌였으나 하필이면 엄청난 흙먼지와 모래 바람이 불어 닥쳤고, 결국 풀이 아직 나지 않았을 때인 3-4월에 몽골고원에서 봄철마다 발생하는 황사이 불어서 조총과 화포가 무력화되는 순간에, 양익을 이룬 후금군 기병대가 덮쳐들었습니다.
조선군 장령들과 포로들은 갑옷과 병장기를 모두 후금측에 내주고 무장해제한 후 허투알라로 이송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진영측에는 명나라 측 패잔병도 섞여 있었으나, 후금은 명나라군과 조선군의 포로를 분리하여, 명나라군 포로는 학살했습니다. 조선군 진영에 파견되어 연락장교를 하던 명나라 유격 교일기는 강홍립이 명나라 포로들은 학살되니 조선군으로 가장해 계속 조선군과 함께 행동하라고 권유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결했습니다.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쟁에 투입된 조선병 13000명 중 30% 정도만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올수있었고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습니다.
7000여명이 전사하고 4천여명이 포로로 잡혔고 이 중 900여 명은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 500여명은 포로신분으로 범죄를 저질러 학살당하며 2700여명만이 생환할수 있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왜란 이후 야심차게 양성한 조총병
수천명 및 조총 수천정이 이 전투로
증발했다. 왜란이후 조선의 인구도
격감했으며, 수공업과 경제도 별로 좋지 않아 조총병 및 조총을 날려먹은 것이
조선의 국방력에 큰 타격이 되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 전투에 파병된 조선의 원군은 약 1만3천명인데 조선군중 주요 지휘관과 많은 병력이 전사하고 5천여명만이 청나라에 투항한다고 합니다. 포로로 후금에 끄려 가게 되지요. 이 전투 이후 요동의 명군은 후금에 밀리게 되어 개원, 선영, 요양이 잇달아 후금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