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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천사들
Ji천사들23.11.08

인현왕후는 어떻게 다시 왕후가 되었는지?

안녕하세요? 인현왕후는 장희빈에게 밀려서 자리에서 쫒겨난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다시 왕후에 자리에 올랐는지 역사적으로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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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조정을 주도하던 서인들은 남인 출신의 후궁이 낳은 원자를 인정할 수 없다며 대립했습니다. 이에 숙종은 서인들을 몰아내고 남인들을 등용하는 갑술환국을 일으켜 인현왕후를 복위시켰습니다.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현왕후는 서인 세력의 실세였던 민유중의 딸이었으며, 5년 뒤인 1686년에 쫓겨났던 장희빈이 궁궐로 복귀하게 된 것은 인현왕후의 권유 덕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실록에 따르면 장희빈을 그리워하는 숙종의 마음을 눈치 챈 인현왕후는 “임금의 은총을 입은 궁인이 오랫동안 민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사체가 지극히 미안하니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1.0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현왕후는 1681년(숙종 7)에 15세의 나이로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주1가 되었다고 합니다. 왕비가 된 초기에 출궁된 궁인 장씨를 다시 불러들여 후덕주3한 왕비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장씨가 숙종의 총애로 점점 교만해져 회초리로 다스린 적이 있는데, 이것이 질투를 하였다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숙종은 경종이 태어난 후 인현왕후가 질투 때문에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않았다며 폐서인하고 사가에 나가 살게 하였습니다. 이때 장씨 측의 남인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5년 후 김춘택의 인현왕후 복위 논의가 갑술옥사로 이어지면서 숙종은 1694년(숙종 20) 4월 12일 삼불거(三不去)를 언급하면서 인현왕후를 복위시켰습니다.

    당시 집권당인 소론의 반발이 심하여 6월에 다시 책비례를 올리고 왕비로 등극하였습니다. 1700년(숙종 26년) 3월에 발병한 괴질로 투병하다가 1701년 8월 14일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현왕후의 복위는 갑술환국(1694) 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숙종이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 폐위를.후회하고 있을 찰나를 알아챈 1694년에 노론계의 김춘택(金春澤)과 소론계의 한중혁(韓重赫)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자, 실권을 쥐고 있던 남인계의 민암(閔黯) · 이의징(李義徵) 등이 민씨복위 운동의 주동자들을 심문, 그 사실을 숙종에게 보고하려 하였다.

    그러나 폐비 사건을 차츰 후회하게 된 숙종은 오히려 기사환국 당시 국문을 주관한 민암과 판의금부사 유명현(柳命賢) 등을 귀양보내고 인현왕후를 다시 입궐하게 되고, 이후 왕비로 복위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에 의해서 폐비가 되었으나 인현왕후는 숙종의 모친인 명성황후와 증조모인 작렬 황후의 상을 같이 치른 조강지처이므로 폐위의 처분은 가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삼불거의 규범에서 쫓겨난 정실 부인을 다시 들오면 새로 들인 정실부인은 친정으로 돌려보내거나 첩으로 강등시킵니다 즉 인현왕후가 무죄라 복위 된 것도 아니고 희빈장씨가 죄를 지어 강등된 것이 아니라 국법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인현왕후는 숙종의 변덕스럽고 갑작스런 결정으로 입궁한 당일에 왕비로 복위가 되었습니다 숙종 실록에 인현왕후가 서궁에 입궁하기 전날부터 복위 될 때까지의 밀당이 상세히 나와 있고 숙종이 내려준 옷을 분에 넘친다고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숙종이 그것은 안 입고 오면 너의 궁인들에게 중죄를 내린다고 엄포를 놓자 결국 입고 왔고 인현왕후가 입궁했을 때 숙종이 직접 마중을 나갔는데 그 자리에서도 인혀왕후는 내 죄가 너무 크다고 자책하였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폐출된 지 5년이 지난 후인 1694년 4월 1일 숙종이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해 정권을 교체하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 당시 숙종은 폐비를 신원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명을 내려 왕비를 교체할 마음이 없음을 선포, 그러나 4월 9일 숙종은 마음을 바꾸어 민씨를 서궁으로 이전해도 좋다는 명을 내렸고, 4월 12일 서궁으로 입거한 그녀에게 왕비 복위령이 내려집니다.

    동시에 왕비였던 장씨는 국모가 둘일수없다는 이유로 왕비의 아래 지위인 빈으로 강등되어 본래의 희빈의 작호를 돌려받게 됩니다.

    이에 대해 서인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애초 노론은 폐비 민씨의 복위를 주장하였던 반면 소론은 장씨의 왕후직을 그대로 둔 채 궐 밖 가사에 거주 중인 민씨가 궐 내 서궁에 입주하기만을 주장했습니다. 숙종의 명이 번복되자 병조판서 서문중과 이조참판 박태상 등의 소론 거두들은 민씨가 먼저 왕비였고 더 오래 왕비의 자리에 있었으나 세자의 어미인 장씨가 더 귀하니 장씨가 강등되고 민씨가 복위하는 것은 부당하다 주장, 정원은 조정백관과 신중히 공론을 한 후 결정지어질 때까지 명을 받들수 없다는 거부의사를 표명합니다. 뒤이어 우의정 윤지완, 공조판서 신익상, 한성부우윤 임상원, 병조참의 이유 등의 소론의 대표 인물들이 줄을 이어 사직상소를 올리는 등 강경한 거부 의사를 보여 갑술환국이 있기까지 합심했던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게 됩니다.

    이에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인 남구만이 민씨의 복위는 이미 정해졌으니 이에 대해 거론하여 다투는 것은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임금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니 천하의 도리에 맞지 않으며 희빈의 강호는 죄가 있어 폐출된 것이 아니라 민씨가 복위함에 있어 왕비가 둘이 있을 수 없으니 부득이한 것이라 선언하여 노론과 소론을 중재합니다

    이로 인해 민씨의 복위가 결정, 노론과 소론 사이에 깊은 골이 생겼으며 노론은 장씨의 친정 오라비인 장희재에게 칼 끝을 돌려 남인과 함께 제거하려 하나 노론의 행위를 희빈 장씨와 왕세자를 제거하기 위한 단계임을 안 남구만과 소론의 강력한 제지로 남인 영수 민암 부자만을 죽일수 있었을 뿐 장희재는 목숨을 유지하며 제주도로 유배됩니다.

    같은 해 6월 1일, 정식으로 왕비 책봉을 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