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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한 쇠똥구리
고혹한 쇠똥구리23.06.14

우리나라 태극기는 언제 만들어졌나요.

모든 나라들이 저마다 자기 나라의 국기를 가지고 있잖아요.그중에 . 우리나라의 태극기는 최초로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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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82년 9월 박영효를 대표로 한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우리나라 태극기는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동경발행 시사신보를 통해 최초의 태극기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맨위에 조선국기라는 캡션과 함께 4괘 안에 음(청) 양(적)의 위치를 지정한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고, 최초의 태극기 4괘는 현재의 극기와는 달리「손」「간」「진」「이」가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49년 10월 15일에 대한민국 규격국기의 태극기가 태극 문양으로 그려졌습니다.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한민국 국기인 태극기는 흰바탕색에 빨간색과 파란색의 태극문양이 중앙에 있고 검은색으로 사방에 건.곤.감.리의 4개의 궤가 둘러싸여 있는 모양인데요.

    이 태극기는 조선의 국왕을 상징하는 '태극팔괘도’를 변형하여, 1882년 고종의 명을 받아 제작한 것이 그 시초라고 볼수 있습니다. 태국기는 1882년에 고종의 명을 받아 처음으로 제작되었고 이 태극기는 1883년 3월 6일 (고종 20년 음력 1월 27일) 정식으로 '조선국기’로 채택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지금까지 전해진 바에 의하면 최초의 태극기는 1882년 9월 박영효(朴泳孝)가 창안, 도안한 것으로 대부분을 알고 있으나, 시사신보(時事新報)가 발견됨으로써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高宗) 황제가 직접 창안하였음이 밝혀졌다.

    그 기사의 내용을 보면 고종(高宗) 황제가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朴泳孝)의 일기 사화기략(使和記略)에도 기록되어 있다.즉, 4각형태의 흰색 바탕에 폭부분 5분지 2를 중심삼아 태극을 그려 청색과홍색을 칠하고 네 귀퉁이에 4괘가 바라보도록 만든 새 국기를 임시 숙소(고베의 니시무라야) 옥상에 휘날리므로써 국왕(고종)의 명령을 다 받들었노라는 내용이 곧 최초의 태극기를 창안하고 도안하였음을 잘 증명하고 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전 부터 태극 모양을 우리나라의 상징으로 썼지만 조선 시대까지 따로 국기가 만들어져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875뇬 운요호 사건 때 일본에 국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돈 고종은 우리나라에도 국기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후 1882년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던 중 고종황제의 명을 받들어 배 안에서 국기를 만들어 달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최초의 태극기 입니다. 고종은 1883년 이 태극기를 조선의 국기로 채택했음, 1948년 대한 민국 국기로 쓰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태극기의 역사로는 1882년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일본에 가면서 ‘태극·4괘 도안’의 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있다고 합니다.

    다음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mois.go.kr/chd/sub/a05/birth/screen.do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기문제가 최초로 거론된 것은 1880년(고종 17) 8월 일본에서 귀국한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주일청국참찬관(駐日淸國參贊官) 황쥰셴[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에서이다.


    중국용기(中國龍旗)를 청나라에 주청(奏請)주1하여 군기(軍旗)와 국기로 사용하도록 권고한 이 제안에 따라 조선정부에서는 그 해 12월 1일에 입북(入北)한 진하겸동지사은사(進賀兼冬至謝恩使) 일행에 사역원부사직(司譯院副司直) 이용숙(李容肅)을 수행시켜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을 통하여 진전시켰던바, 조선순문(朝鮮詢問) 8조 중 제7조가 그것이다.


    그 내용은 황쥰셴의 제안을 듣고 우리나라의 선박에 사용할 기표(旗標)주2를 제정함에 있어서 참고로 중국선박에 사용하고 있는 기표와 우리나라의 기표에 사용할 도식과 색상에 관하여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홍장은 1881년 2월 2일 올린 상주문에서 중국용기와 같은 화룡방기(畫龍方旗)를 국기와 선박기표로 사용하는 데 동의하고, 다만 제정과 사용의 절차상 문제에 대하여 용기의 척촌(尺寸) · 회구(繪具)주3 · 안색(顔色) · 도식(圖式)주4 등은 북양대신에게 자문을 구하여 처리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2월 4일 청나라 덕종(德宗)은 조선정부에 회자(回咨)할 것을 명하였고, 이 회자문은 3월 16일 성경예부(盛京禮部)의 자문으로 조선정부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 뒤 조선정부에서 어느 정도 구체화시켰는지는 불명하다.


    국기문제가 재론된 것은 조미조약이 체결되던 1882년 4월 6일의 일로, 조선측의 전권부관(全權副官) 김홍집과 청사(淸使) 마젠충[馬建忠] 사이에서 대두되었다.


    재론의 계기가 된 것은 양국 사신의 업무연락을 담당하였던 홍로시(鴻臚寺) 사품(四品) 이응준(李應俊)이 독창적으로 제작한 조선측 국기도안을 마젠충에게 제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논의에서 마젠충은 황쥰셴이 제안한 중국용기의 사용을 반대하면서 조선국왕의 복색 · 문양 및 조야복색 등을 기초로 하여 백저청운홍룡기(白底靑雲紅龍旗)의 도식을 제안하였으며, 다만 용조(龍爪)를 4자로 하여 중국용기와 구별되도록 하였다.


    그 뒤 4월 11일 김홍집은 이응준이 제시한 도식의 수정안으로 홍색을 청 · 백색으로 바꾸어 권자(圈子)하는 안을 제시하였다. 이 때 마젠충은 백저(白底)에 중앙에 반홍반흑(半紅半黑)의 태극도(太極圖)와 그 둘레에 팔도(八道)를 뜻하는 흑색의 팔괘(八卦) 및 홍색의 주연(周緣)주5이 있는 도식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태극 · 팔괘도식의 국기제정문제가 조선정부에서 논의되었다는 것은 1882년 8월 9일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 박영효(朴泳孝)가 메이지환(明治丸) 편으로 출항한 다음 영국인 선장과 상의하여 태극기 대 · 중 · 소 3본(本)을 만들었다는 것과, 태극도에 반홍반흑을 사용하자는 마젠충의 제안이 반홍반청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다.


    박영효는 8월 22일 태극기 소본(小本)과 함께 국기제정사실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 보고하였으며, 1883년 1월 27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장계에 따라 팔도사도(八道四都)에 행회(行會)함으로써 태극기가 정식으로 국기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현행 태극기를 대한민국 국기로 정식 공포한 것은 1949년 10월 15일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조선수신사로 일본으로 향하던 박영효가 최초로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모습과는 약간 다른 가로 모양의 태극기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