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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4

황산대첩의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황산대첩이 구체적으로 어떤 전쟁이었나요?

그리고 황산대첩에서 활약을 한 사람은 누구이며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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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세기 후반에 극심하던 왜구의 노략질은 1376년홍산(鴻山)에서 최영(崔瑩)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잠잠하였다. 그러나 1380년 8월에 5백척의 대선단으로 진포(鎭浦: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금강 어귀)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타고 온 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고 상륙해 충청·전라·경상 3도 연안의 주(州)·군(郡)을 약탈·방화·살육하였다. 이 때 시체가 산야를 덮고, 그들이 운반 중에 흘린 쌀이 길 위에 한자나 깔릴 지경이었다. 조정에서는 나세(羅世)를 상원수로, 최무선(崔茂宣)을 부원수로,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로 하여 왜적을 치도록 하였다.

    *경과와 결과

    진포싸움은 최무선이 만든 신무기인 화포를 처음 사용해 묶어놓은 적의 함선을 모두 불태워 대승을 거두어 격렬했던 왜구의 만행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목숨을 구한 360여 명의 적들은 옥주(沃州: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적들과 합류했는데, 선박이 소실당하고 퇴로를 잃게 되자 상주·영동·옥주 등지로 진출해 약탈을 자행하였다.

    상주 방면으로 진출한 왜구의 주력부대는 다시 경산(京山 :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을 침략하고, 사근내역(沙斤乃驛: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에 집결, 반격하였다. 이때 왜구를 추격하던 9원수[배극렴(裵克廉)·김용휘(金用輝)·지용기(池勇奇)·오언(吳彦)·정지(鄭地)·박수경(朴修敬)·배언(裵彦)·도흥(都興)·하을지(河乙址)] 가운데 박수경과 배언을 포함, 5백여 명의 군사가 전사하였다. 9월 왜구는 남원 운봉현(雲峰縣)을 방화하고, 인월역(引月驛: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 인월리)에 주둔하면서 장차 북상하겠다고 하여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지리산과 해주 방면에서 왜구 토벌에 용맹을 떨친 이성계를 양광(楊廣)·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體察使)에, 우인열(禹仁烈)·이원계(李元桂)·박임종(朴林宗)·도길부(都吉敷)·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등을 원수로 삼아 이성계를 도와 왜구대토벌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양측은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의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적들이 험지에 자리잡고 버티자 죽음을 각오한 이성계가 산 위로 올라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총공격을 하여 일대격전을 벌여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 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하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고려사』열전 변안열(邊安烈)전에 의하면, 처음에는 적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고 한다(왜구 부대의 규모나 이성계의 군공이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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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24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황산대첩은 1380년 9월 이성계 등이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에서 왜구에게 크게 이긴 전투입니다.

    14세기 후반 극심하던 왜구의 노략질은 1376년 홍산에서 최영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잠잠했으나 1380년 8월 5백척의 대선단으로 진포에 침입합니다.

    왜구는 타고 온 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고 상륙해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연안의 주, 군을 약탈, 방화, 살육했습니다. 이때 시체가 산야를 덮고 그들이 운반 중에 흘린 쌀이 길 위에 한자나 깔릴 지경이었으니 조정에서는 나세를 상원수로 , 최무선을 부원수로 , 심덕부를 도원수로 하여 왜적을 치도록했습니다.

    진포싸움은 최무선이 만든 신무기인 화포를 처음 사용해 묶어 놓은 적의 함선을 모두 불태워 대승을 거두어 격렬했던 왜구의 만행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으나 목숨을 구한 360여 명의 적들은 옥주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적들과 합류했는데 선박이 소실당하고 퇴로를 잃게 되자 상주, 영동, 옥주 등지로 진출해 약탈을 자행합니다.

    상주 방면으로 진출한 왜구의 주력부대는 다시 경산을 침략, 사근내역에 집결, 반격했는데 이때 왜구를 추격하던 9원수 가운데 박수경과 배언을 포함, 5백 여 명의 군사가 전사하고 9월 왜구는 남원 운봉현을 방화하고 인월역에 주둔하면서 장차 북상하겠다고 하여 조정을 놀라게 합니다.

    이에 조정에서 지리산과 해주 방면에서 왜구 토벌에 용맹을 떨친 이성계를 양광, 전라, 경상 삼도도순찰사에 임명하고 변안열을 제찰사, 우인열,이원계,박임종, 도길부, 홍인계, 임성미 등을 원수로 삼아 이성계를 도와 왜구대토벌작전에 나서게 했습니다.

    양측은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의 정산봉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데 적들이 험지에 자리잡고 버티자 죽음을 각오한 이성계가 산 위로 올라가 적을 맞아 싸우자 모든 군사가 총공격을 하여 일대격전을 벌여 아지발도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크게 물리치게 됩니다.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7일간이나 물을 먹을수 없었다고 하며 포획한 말이 1600여필이고 병기도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고 하며 고려사 열전 변알열전에 의하면 처음에 적군이 아군보다 10배 많았으나 겨우 70여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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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보니 황산대첩은 1592년 임진왜란 중 전라도 임시정부가 조성한 '사일전략'에 따라, 일본군이 전라도를 선점하려는 시도를 막고자 함경도와 함께 일본군을 맞아 싸웠던 전쟁입니다. 전투는 일본군의 이쪽으로 치우쳐져, 결국 일본군 패배로 끝났습니다. 전투에서 이끌었던 이순신 장군은 이전에는 불우한 상황에서도 전투에서 승리했던 전략을 적용하여, 이전에는 군사전략으로 책으로만 존재했던 '포병전술'을 실제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적용하여 이전보다 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하였습니다. 참고 하셔서 도움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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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말 1380년(우왕 6년) 9월에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고려군이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크게 격퇴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오랜 시간 고려를 괴롭히던 왜구의 기세가 현저하게 약화되었고,

    이성계는 국가의 영웅으로 부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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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황산대첩 내용 요약해주세요 한 6줄 정도로 알기 쉬운말로 사진도 한장 주세요



    1. 발생배경


    1376년(우왕 2년) 홍산(鴻山) 전투에서 최영의 군사에 크게 패한 왜구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1378년(우왕 4년) 5월 대마도로부터 대거 침입하여 그 대부분이 지리산 방면으로 침입하였다. 이때부터 왜구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성계는 지리산·해주(海州), 그밖에 가는 곳마다 적을 격퇴시켜 그 용명(勇名)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던 중, 1380년(우왕 6년) 9월에 황산에서 또한 크게 충돌하게 되었다.



    2.결과


    이성계의 황산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 뒤부터 왜구의 세력은 약화되고, 고려의 왜구대책은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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