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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매미372
젊은매미37223.06.01

조선시대 숙종때 장희빈은 어떤인물인가요?

조선시대 왕들을 보다보니 유명한 여인들도 많이 나오던데 그중에 숙종때 장희빈이 있던데 어떤 인물인가요? 결국 자식을 왕으로 만들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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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1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문 첫 장에 ‘윤승한(尹昇漢)1) 저(著) 력사소설(歷史小說) 장희빈(張禧嬪) 서울 일성당(一成堂) 서점(書店) 발행(發行)’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차례 면에 ‘장정(裝幀) 운보 김기창’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1952년에 재판이 발행되었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고 자신의 아들을 불구로 만들려 했다는 등 역사적 근거가 희박한 이야기들을 소설적 흥미를 위해 삽입하고 있다. 장희빈의 삶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현종대부터 정조대까지 이르는 역사의 큰 줄기를 풀어내려 시도한 작품이다.

    나이 서른의 현종은 신체가 강건하지 못해 자신의 사후를 걱정한다. 그는 영의정 허적과 우의정 김수항에게 동궁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난다. 어린 동궁이 즉위하니 이가 숙종이다. 양반 가문의 침모로 일하는 옥순은 남인 측에 속한 역관 윤규의 딸인데, 남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에 휘말려 아버지를 잃는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옥순은 서인들에게 복수심을 품는다. 그녀는 중인 출신의 거부 장현의 후처로 들어가 옥정이라는 어여쁜 딸을 낳는다.

    남인들은 옥정의 미모를 이용해 권력을 획득하려는 야심을 품고 그녀를 궁녀로 들여보낸다. 옥정의 미모는 궁궐에서도 눈에 띄어 왕의 총애를 받는다. 세월이 흘러 왕이 성장하자 호조판서 김만기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어 들어온다. 그러나 왕의 마음은 이미 옥정에게 기울어 있어, 왕비 김씨와 옥정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옥정이 왕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자 왕비는 노여워하여 옥정의 잘못을 대왕대비에게 고하고, 옥정은 궁에서 쫓겨난다. 왕비 김씨가 죽고 새로 민씨가 왕비가 되자, 옥정은 재입궁한다.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던 중 옥정이 먼저 왕자를 낳자 왕은 그녀를 총애한다. 이에 그녀는 왕비를 없애고 자신이 중전이 되고자 한다.

    옥정의 세력에 힘입어 남인이 득세하고 서인이 몰락한다. 남인과 결탁한 옥정의 모함에 숙종은 결국 왕비 민씨를 내쫓고 옥정을 왕비로 맞아들인다. 옥정의 친정인 장 씨 일가와 남인들은 막대한 권력과 부귀를 누린다. 옥정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폐비 민씨가 복위될까 두려워한다. 그녀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폐비를 죽이려 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숙종의 총애를 잃는다. 옥정에게서 마음이 떠난 숙종은 폐비를 섬기던 무수리 최씨와 동침한다. 최씨가 임신하자, 옥정은 그녀를 고문하는 등 악행을 저지른다.

    마침내 옥정은 궁에서 쫓겨나고, 폐비 민씨가 복위된다. 옥정이 쫓겨나자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득세하지만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당쟁이 끊이지 않는다. 옥정은 궁에서 쫓겨난 후에도 왕비를 독살하는 등 악행을 거듭하다 사약을 받는다. 옥정의 아들은 후에 자라 경종이 되고, 최씨의 아들은 후에 영조가 된다. 피바람을 일으킨 당파 싸움은 후에 정조 대에 이르러서야 잠잠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희빈 [張禧嬪] (한국현대장편소설사전 1917-1950, 2013. 2. 5., 송하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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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희빈의 본명은 장옥정으로 숙종의 두 번째 비로 궁녀 출신이었다가 왕의 총애를 받고 희빈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당시 남임과 서인의 대립으로 갈등이 매우 심했는데 숙종의 첫 번째 비인 인현왕후는 서인, 장 희빈은 남인 쪽의 인물이었습니다. 장 희빈은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황후에 의해 쫓겨났다가 명성황후의 사후에 궁에 환궁해 소의가 되었고 얼마 후 아들 윤을 낳았습니다. 숙종은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고 이를 반대한 서인들을 몰아내고 남인에게 힘을 실어주었지요. 권력을 가진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권력을 쥐면서 인현왕후가 돌아오고 다시 장희빈은 후궁이 되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장희빈은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했고 이 때문인지 인현왕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둡니다. 후에,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밀고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로 사사 당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본처를 저주한 악독한 악녀라고 말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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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희빈의 본명은 장옥정으로 숙종의 두 번째 비로 궁녀 출신이었다가 왕의 총애를 받고 희빈의 자리까지 올랐어요. 당시 남임과 서인의 대립으로 갈등이 매우 심했는데 숙종의 첫 번째 비인 인현뢍후는 서인, 장 희빈은 남인 쪽의 인물이었어요. 장 희빈은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황후에 의해 쫓겨났다가 명성황후의 사후에 궁에 환궁해 소의가 되었고 얼마 후 아들 윤을 낳았어요. 숙종은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고 이를 반대한 서인들을 몰아내고 남인에게 힘을 실어주었어요. 권력을 가진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왕비가 되었어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권력을 쥐면서 인현왕후가 돌아오고 다시 장희빈은 후궁이 되었어요. 이에 분노한 장희빈은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했고 이 때문인지 인현왕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둡니다. 후에,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밀고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로 사사 당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본처를 저주한 악독한 악녀라고 말하지만 개인적으로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물론 장희빈의 행동이 도를 넘기는 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녀 또한 피해자입니다. 숙종이 그녀를 희빈과 왕비의 자리에 앉힌 것은 사랑이라기 보다는 권력을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 남인과 서인의 권력 다툼에 따라 왕비의 자리가 바뀌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장희빈을 무조건 악녀라고 할 것이 아니라 빌미를 제공하고 권력을 위해 두 세력을 저울질한 숙종의 잘못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제 1황후는 바얀 후투그의 사후 기황후가 정비가 되었지만 황태자의 황위 계승을 둘러싼 정쟁으로 원의 국력은 극격히 쇠퇴했고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주원장이 명을 세우고 원을 멸망시켰고 원의 황족들은 응창부로 퇴각하였습니다. 이후 기황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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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장희빈(희빈 장씨)는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으로써, 세자(후의 경종, 윤)까지 출생한 생모였으나 결국 자기 자신의 우둔함으로 인해 사사되게 되는 비운의 여인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 자기 자신이 자초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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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이 되었습니다. 1688년 소의(昭儀)로 승진하고 왕자 이윤(李昀: 뒤의 景宗)을 낳았습니다. 왕은 기뻐하여 세자로 봉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송시열(宋時烈) 등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들의 원조를 얻어 책봉하려 했습니다.


    이에 서인의 노론·소론은 모두 왕비 민씨(閔氏)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숙종은 듣지 않고 1689년 정월에 이윤을 세자로 봉하고, 장소의는 희빈으로 승격했습니다. 이 때 송시열이 세자로 봉하는 것이 아직 이르다고 상소하였습니다. 왕은 이미 명호(名號)가 결정된 다음에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진노했습니다.


    이에 남인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 등이 송시열의 상소를 논박하며 파직시켜 제주도로 유배하게 하고 다시 사사(賜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송시열은 중로 정읍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사약을 받았습니다.


    이 밖에 서인의 영수들도 파직 또는 유배를 면하지 못했다. 반면에 남인의 권대운(權大運)·김덕원(金德遠) 등이 등용되었습니다. 이 정권의 교체를 기사환국 또는 기사사화라고 합니다.


    이 해 5월에 민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으려 할 때 서인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 80여 명이 상소하여 이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참혹한 형문을 받게 되니 이후 정국은 남인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기사환국 후 시간이 흐르면서 숙종은 폐비사건을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694년 서인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 복위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습니다. 이 때 남인의 영수요 당시 우의정이었던 민암(閔黯)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 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혀 일대 옥사를 일으켰습니다.


    이 때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옥사를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했으며, 권대운·목내선(睦來善)·김덕원 등을 유배했습니다. 이어 소론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내렸는데 이것을 갑술옥사라고 합니다. 또한, 이미 죽은 송시열·김수항(金壽恒) 등은 복작(復爵)되고 남인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날 때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희빈에게 보낸 서장(書狀) 속에 폐비 민씨에 관련된 문구가 있어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했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윤지완 등이 용서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왕비 민씨가 죽은 다음에, 장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되었습니다. 이 일에 관련된 희빈과 장희재는 살해되고 궁인(宮人)·무녀와 그 족당(族黨)도 화를 입었다. 이것을 무고(巫蠱)의 옥(獄)이라고 합니다.


    이 때 장희빈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취한 남구만·최석정(崔錫鼎)·유상운(柳尙運) 등 소론의 선비들도 몰락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였습니다. 숙종은 이후 빈(嬪)을 후비(后妃)로 승격하는 일을 없애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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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희빈 장씨, 장희빈 또는 옥산부대빈 장씨는 조선 숙종의 빈으로, 제20대 왕 경종의 어머니이다. 본명은 장옥정, 본관은 인동이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이며, 어머니는 장형의 계실인 윤씨이다. 역관 장현의 종질녀이다. 조선 왕조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이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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