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다 원칙 탄생배경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흔히들 체포 구속할때 미란다원칙을 고지하고 체포 구속을 해야한다고 알고있습니다.
그렇다면 미란다 원칙이 어떻게 탄생한건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란다 원칙은 1963년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18세 소녀를 강간한 죄로 체포된 에르네스토 미란다의 판례로 유래됩니다.
미란다는 1963년 8월 은행에서 8달러를 강탈한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처음 2시간동안 범행을 부인하다 자백하는 과정에서 여죄로 18세 소녀를 강간했다고 진술합니다.
이때 변호사가 같이 입회하지 않았고 나중에 미란다 측이 재판과정에서 이를 지적하며 자신이 자기의 법적 권리를 충분히 고지받지 못했으며, 고로 법적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작성된 진술서가 증거가 될수 없다 주장합니다.
당시 경찰은 미란다의 자백이 적힌 진술서를 바탕으로 미란다를 기소, 상급법원인 애리조나 주 법원에서 승소합니다.
그러나 얼 워런 대법관이 중심이 된 미국 연방대법원은 미란다가 미국 수정헌법 제5조의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아도 될 권리와 제6조 변호사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하였고, 연방대법원은 경찰 심문 중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았고, 진술거부권도 여러면에서 보장되지 못했으며, 진술서에 피고가 자신의 법적 권리를 충분히 안다고 기재하는 것으로 피고가 그의 헌법상 권리를 포기한다고 보기 어려우니 자백이 적인 진술서는 증거가 될수없다고 하여 1966년 연방대법관들은 5대4로 판결을 기각합니다.
미란다 판결은 엄청난 논란이었고, 많은 검사들과 경찰관들이 앞으로 수사가 불가능해질것이고 흉악범들이 처벌받지 않고 풀려날 것이라 예상합니다.
연방대법원의 판결 후 에르네스토 미란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근거로 히닉스시 검찰에 의해 다시 기소되었고,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습니다.
미란다는 1972년 가석방으로 출소 후 법원 앞에서 자신이 바로 그 미란다라며 , 미란다 원칙이 쓰인 카드에 자신이 서명을 해서 돈벌이를 했습니다.
1976년 어느 술집에서 자기가 미란다 원칙의 그 미란다라고 얘기하던 중 시비가 붙고, 상대는 미란다의 목을 칼로 그러 치명상을 입히게되고 그는 이송 중 사망합니다.
용의자 에세키엘 모레노는 멕시코인으로 검거를 피해 달아났으나 체포되었는데 모레노는 미란다 원칙에 있던 묵비권을 행사하며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받습니다.
이것이 미란다 원칙의 유래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란다의 원칙은 1963년 미국 에리조나에서 성폭행 혐의로 체포된 미란다의 재판 결과 판결로 확립되었다고 하지요. 1966년 연방 대법원은 그가 진술 거부권, 변호인 선임권 등의 권리를 고지(告知)받지 못하여 5대 4의 표결로 미란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부터 범인 체포 시 항상 범인의 권리를 고지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피의자의 이름에서 유래 했습니다///
미란다의 원칙은 총 3가지로
피의자는 묵비권을 행사할수 있다.
피의자의 모든 발언이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수 있으며
피의자는 변호인의 조언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1. 미란다 원칙의 유래 미란다 원칙이란 1966년에 선고된 미국 미란다판결에서 선언된 것으로서 수사기관에서 피의자를 구속시에 일정한 사항을 알려 주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에도 아래와 같은 규정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법원이나 수사기관에서 피고인이나 피의자를 구속할 때에는 아래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있는 사항을 고지하여야 합니다.
이를 고지하지 아니하고 하는 구속은 불법이므로 이런 불법구속을 하는 경찰관에게 폭행하였다고 하여도 공무집행방해죄가 되지 아니하고 단순한 폭행죄가 될 뿐입니다.
<미란다사건의 배경>
피의자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경찰의 가혹행위가 중단되지 않았던 것은 1960년대까지 수정헌법에 의해 보장된 피의자의 권리가 주정부에는 적용이 되지 않고 연방법원과 연방수사국(FBI)에만 적용이 되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에 워렌대법원장이 이끄는 연방대법원은 권리장전의 적용범위를 차츰 늘려갔고 이 과정에서 주정부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피의자의 인권도 신장될 수 있었다.
미란다의 상고심이 열리기까지 미국 법원은 수사기관의 자백 강요를 예방하기 위해 보장한 권리, 즉 묵비권을 행사할 권이나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거부를 항 권리는 경찰의 신문과정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인정했다. 주법원에서 피의자의 자백을 증거로 채택할 지의 여부는 전체적인 신문상황이 강압적이었느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관례였다. 예를 들어보면 경찰이 피의자를 회유하거나 압력을 행사했더라도 피의자에게 음식을 제때에 주고 밤에 잠을 자게 하면서 얻어낸 자백이라면 전체적인 상황이 강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증거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 비추어 보면 미란다의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그의 자백이 강압적인 상황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란다가 연방대법원에 상고할 당시 연방대법원은 형사피의자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점차 확대하고 있었다. 1958년 Crooker v. California에서 연방대법원은 피의자가 경찰의 신문과정에서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기회를 차단당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자백을 증거로 인정할 수 있다고 판결했지만 1964년 Massiah v. U.S.에서 연방대법원은 일단 기소된 피의자는 변호사가 없는 상태에서 불리한 발언을 하도록 신문받거나 유도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Malloy v. Hogan에서는 변호사를 접견할 권리가 주정부 관할사건에도 적용된다고 하였으며, 같은 해 Escobedo v. Illinois에서도 연방대법원은 경찰이 피의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변호사 접근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얻어낸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결정했다. Escobedo사건은 해결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점을 남겼다.
첫 번째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Escobedo사건과 같은 경우 즉 피의자가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고, 경찰서에서 신문을 받고, 피의자가 변호인을 요구하고 있으며 동시에 변호사가 경찰서에 있으며 피의자접견을 요구하는 상황과 같은 유사한 상황에서만이 인정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두 번째로 경찰이 피의자에게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고지해 주어야 하는지도 불분명했다. 만약 피의자가 변호사를 선임하고 싶어하지만 재정적 능력이 없는 경우 경찰은 신문을 계속할 수 있는지, 만약 피의작 변호사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등도 확실하지 않았다.
따라서 하급법원으로부터 Escobedo사건에 대한 각각 다른 해석이 쇄도했으며, 1965년 한해동안 연방대법원은 무려 170여건에 달하는 묵비권과 변호사조력권에 관련된 사건의 상고 허가를 요청받았다. 연방대법원은 1966년 미란다사건 외에 3건의 비슷한 사건을 선택해 상고를 허가하고 병합심리하기로 결정했다. 연방대법원이 미란다 사건과 함께 심리한 나머지 세 사건도 모두 미란다와 같은 강력범들에 의해 상고된 사건으로 피고인들은 각각 무장강도, 은행강도, 강도살인 피의자였다. 이들은 미란다와 마찬가지로 모두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경찰관, 혹은 검사로부터 신문을 받았다. 이들은 묵비권에 대해 고지를 받지 못하고 변호사의 접근이 차단된 채 얻어낸 자백으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하급법원의 판결이 무효라고 항변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어네스토 미란다'는 1963년 애리조나 피닉스의 한 극장 앞에서 당시 18세 소녀를 차로 납치해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전과경력 때문에 연행된 그는 피해자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됐다. 미란다는 최초에는 무죄라고 주장했으나, 몇 시간에 걸친 경찰 신문 끝에 범행을 자백하였다. 하지만 재판이 시작되자 미란다는 자백을 번복하고 의의를 제기하였으나, 1심과 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미란다는 다시 대법원에 경찰로부터 묵비권 등의 권리를 통보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항소하였고, 그의 변호인 측은 미란다가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듣지 못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결국 1966년 대법원은 경찰이 미란다에게 묵비권과 변호사 조력권이 있음을 사전에 알려 주지 않은 상태에서 받은 미란다의 자백은 유죄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며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후 그의 이름을 딴 미란다원칙은 경찰이 용의자를 체포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 원칙으로 확립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란다원칙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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