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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8

양녕대군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과거 한국사를 봤을때 '양녕대군'이라고 하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양녕대군의 일대기와 업적은 어떤게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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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형이다.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폐위되고, 그 뒤 전국을 누비며 풍류를 즐겼습니다. 시, 서에 능하였습니다.

    1394년 태종 이방원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이며, 부인은 광산 김씨 김한로의 딸이다. 이름 이제이고 자 후백, 시호는 강정이다. 1404년(태종 4) 10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1406년 부왕 태종이 어린 세자에게 양위의 뜻을 밝히자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외삼촌 민무구, 민무질이 어린 양녕에게 의탁하여 권세를 탐하다 처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어린시절부터 정치적 파장이 있었습니다.

    양녕은 성품이 자유분방하여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사냥을 좋아했고 기생을 탐하여 궁궐 내 처소에 여자를 불러들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벌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 뜻에 부합하지 못하고, 남의 첩인 어리라는 여자를 탐하여 임신까지 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궐 밖에서 아이를 낳게되었고 그의 비행을 감싸주던 장인 김한로는 귀양을 가게되었습니다. 황희도 세자 양녕을 두둔하다 처벌을 받았다. 결국 유정현 등의 상소로 폐세자되어 경기도 광주로 물러나 살게되었다. 양녕이 폐세자 되자 뒷날 세종이 된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책봉되었다. 당시 양녕은 자신의 비행을 충녕이 태종에게 고한 것으로 알고 충녕을 원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은 이러한 양녕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잘 알았기에 그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는데 양녕을 탄핵하는 상소는 모두 물리고 받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양녕이 궁궐을 나와서는 타고난 그의 기질대로 한량으로 생활하였는데 시, 서예, 음악 등 예술에 관심을 가졌고 일생을 풍류객으로서 자유분방한 생을 지냈다. 호탕한 기질로 술을 좋아하고 기생들과 어울렸으나 이러한 기질이 정도를 지나쳐 그의 문란함은 세종에게 여러차례 상소로 올려지기도 했다. 특히 여자와 어울린 간통사건이 많았으며 양녕의 자녀들도 방탕한 생활로 세간에 회자되었습니다.

    문종이 사망하고 어린 단종이 보위에 오르자 정치적으로는 세조를 지지하였고 그가 일으킨 계유정난에는 직접적 개입하지 않았지만 세조가 조카(단종)와 정적(김종서 등 사육신)을 살해하는데 동조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에도 그의 방탕한 생활은 계속되었지만 정치적으로 세조를 지지한 덕분에 오히려 보호를 받았다. 69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서울 숭례문의 편액 '숭례문'이 그의 필적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녕대군 [讓寧大君]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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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23.05.29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394년 태종 이방원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며, 부인은 광산 김씨 김한로의 딸이다. 이름 이제(李禔)이고 자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1404년(태종 4) 10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1406년 부왕 태종이 어린 세자에게 양위의 뜻을 밝히자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외삼촌 민무구, 민무질이 어린 양녕에게 의탁하여 권세를 탐하다 처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어린시절부터 정치적 파장이 있었다.

    양녕은 성품이 자유분방하여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사냥을 좋아했고 기생을 탐하여 궁궐 내 처소에 여자를 불러들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 뜻에 부합하지 못하고, 남의 첩인 어리(於里)라는 여자를 탐하여 임신까지 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궐 밖에서 아이를 낳게되었고 그의 비행을 감싸주던 장인 김한로는 귀양을 가게되었다. 황희도 세자 양녕을 두둔하다 처벌을 받았다. 결국 유정현(柳廷顯) 등의 상소로 폐세자되어 경기도 광주로 물러나 살게되었다. 양녕이 폐세자 되자 뒷날 세종이 된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다. 당시 양녕은 자신의 비행을 충녕이 태종에게 고한 것으로 알고 충녕을 원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은 이러한 양녕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잘 알았기에 그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는데 양녕을 탄핵하는 상소는 모두 물리고 받지 않았다고 전한다.

    양녕이 궁궐을 나와서는 타고난 그의 기질대로 한량으로 생활하였는데 시, 서예, 음악 등 예술에 관심을 가졌고 일생을 풍류객으로서 자유분방한 생을 지냈다. 호탕한 기질로 술을 좋아하고 기생들과 어울렸으나 이러한 기질이 정도를 지나쳐 그의 문란함은 세종에게 여러차례 상소로 올려지기도 했다. 특히 여자와 어울린 간통사건이 많았으며 양녕의 자녀들도 방탕한 생활로 세간에 회자되었다.

    문종이 사망하고 어린 단종이 보위에 오르자 정치적으로는 세조를 지지하였고 그가 일으킨 계유정난에는 직접적 개입하지 않았지만 세조가 조카(단종)와 정적(김종서 등 사육신)을 살해하는데 동조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에도 그의 방탕한 생활은 계속되었지만 정치적으로 세조를 지지한 덕분에 오히려 보호를 받았다. 69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서울 숭례문의 편액(扁額) '崇禮門(숭례문)'이 그의 필적이라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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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녕대군의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형 입니다.

    세자로 책봉 되었으나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폐위되고, 그 뒤 전국을 누비며 풍류를 즐겼습니다. 시,서예에 능하였습니다.

    양녕대군의 성품은 자유분방하고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 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냥을 좋아했고, 기생을 탐하고, 남의 첩도 탐하여 임신까지 시키기도 하였지요.

    궁궐을 나와서는 타고난 그의 기질대로 한량으로 생활하면서 시,서예, 음악 등 예술에 관심을 가졌고, 일생을 풍류객으로 자유분방한 생을 지냈습니다.

    문종이 사망하고 어린 단종이 보위에 오르자 정치적으로는 세조를 지지 하였고 그가 일으킨 계유정난에는 직접적 개입하지 않았지만 세조가 조카(단종)와 정적(김종서 등 사육신)을 살해 하는데 동조한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이후에도 그의 방탕한 생활은 계속 되었지만 정치적으로 세조를 지지한 덕분에 오히려 보호를 받게 되었고, 69세 일기로 사망하여 세종의 묘정에 배향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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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름은 이제(李禔). 자는 후백(厚伯). 태종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민제(閔霽)의 딸이며, 부인은 광주 김씨(光州金氏)로 김한로(金漢老)의 딸입니다.

    1404년(태종 4) 왕세자로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 범절이라든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이나 엄격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하는 등의 자유분방한 풍류 생활을 더 즐겼습니다.

    이와 같은 품행은 부왕인 태종의 눈에도 걱정스럽게 비쳤으며, 엄격한 유학자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종은 몇 차례 군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행을 닦도록 타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심한 벌을 주기도 했으나, 끝내 부왕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1418년에 유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동생이며, 뒷날 세종이 된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습니다. 그런데 양녕대군이 왜 그러한 파격적인 행동을 했으며, 세자의 지위를 잃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동생인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세종과 매우 우애가 깊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왕세자였고 현재 왕이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일거일동이 세밀한 관찰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탄핵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특이한 생애는 후세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듯하며, 재미있는 일화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시와 서에 능하였습니다. 시호는 강정(剛靖)입니다. 아들 셋과 딸 넷을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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