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개국공신인 이지란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태조 이성계의 의형제이자 심복 중 심복이었으며 개국공신들 중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하사받은 전쟁영웅인 이지란은 원래는 여진족 출신이라는데요.
이지란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은 청해, 초성은 퉁, 초명은 쿠룬투란티무르, 자는 식형, 남송 악비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여진의 금패천호 아라부카이며 이화영의 아버지 입니다.
이성계와는 결의형제를 맺었고 출신지는 북청, 첫째 부인은 함안군부인 혜안택주 윤씨이며 둘째 부인은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딸인 상산군부인 곡산강씨 입니다.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가 되었으며 1371년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해 북청에 거주, 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습니다.
1380년 이성계의 편장으로서 황산에서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무찔렀으며 1385년 이성계의 휘하로 왜구를 함주에서 격파해 선력좌명공신에 봉해지고 밀직부사에 임명, 1388년 위화도회군에 참가해 1390년 밀직사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서해도에서 왜구를 격파해 판도평의사사, 지문하부사에 임명, 1392년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 여진추장 월로티무르의 반란을 정벌한 공으로 명나라에 의해 청해백에 봉해졌습니다.
이성계를 추대한 공훈으로 1392년 참찬문하부사에 오르고 보조좌명개국일등공신 청해군에 봉해졌고 1393년 경상도절제사로 왜구 방어를 담당, 이어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갑주, 공주의 성을 축조했습니다.
위화도 회군에 참가한 공훈으로 회군일등공신으로 봉해졌으며 1393년 동북면도안무사, 1397년 동북면도병마사, 1398년 문하시랑찬성사, 판형조사의흥삼군부사중군절제사가 되었습니다.
같은해 제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에 봉해지고 1400년 제 2차 왕자의 난 때에도 공을 세워 1401년 익대좌명공신 3등에 봉해졌으며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나자 그도 청해에 은거하며 남정, 북벌에서 많은 살상을 한 것을 뉘우쳐 불교에 귀의, 태조의 묘정에 배향, 묘소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읍 안곡리에 있으며 시호는 양렬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씨조선의 개국 공신인 이지란은 원래 북청지역에서 활동하던 여진족 족장이자 몽골의 금패천호인 아라부카의 아들로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가 되어 1371년 1백호의 휘하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순하여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이성계의 의형제가 되어 개국공신들중 가장 많은 토지를 하사받은 개국 공신이었습니다 1331년 태어나 1402년에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무신. 본관은 청해(青海). 초성은 퉁(佟), 초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 자는 식형(式馨). 남송 악비(岳飛)의 6대손으로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화(阿羅不花)의 아들이며, 화영(和英)의 아버지이다. 이성계와는 결의형제를 맺었고, 출신지는 북청(北青 ; 青海)이다. 부인은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조카딸인 혜안택주 윤씨(惠安宅主尹氏)이다.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가 되었으며, 1371년(공민왕 20)에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하여 북청에서 거주하며 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1380년(우왕 6) 이성계의 편장으로서 황산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를 무찔렀으며(황산대첩), 1385년 이성계의 휘하로 왜구를 함주에서 격파하여 선력좌명공신(宣力佐命功臣)에 봉해지고 밀직부사에 임명되었다. 1388년 위화도(威化島)의 회군에 참가하여 1390년(공양왕 2) 밀직사가 되었다. 같은 해 서해도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판도평의사사(判都評議司事) · 지문하부사(知門下府車)에 임명되었다.
1392년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建州衛) 여진추장 월로티무르(月魯帖木兒)의 반란을 정벌한 공으로 명나라에 의하여 청해백(青海伯)에 봉해졌다. 조선에 와서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공훈으로 1392년(태조 1)에는 참찬문하부사(參賛門下府事)에 오르고 보조좌명개국일등공신(補祚左命開國一等功臣) 청해군(青海君)에 봉해졌다. 1393년 경상도절제사로 왜구방어를 담당하었고 이어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갑주 · 공주(孔州)의 성을 축조하였다.
또 위화도의 회군에 참가한 공훈으로 회군일등공신(回軍一等功臣)에 봉해졌다. 1393년 동북면도안무사, 1397년 등북면도병마사, 1398년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賛成事) · 판형조사의흥삼군부사중군절제사(判刑曺事義興三軍府事中軍節制使)가 되었다. 같은 해 제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워 정사공신(政社功臣) 2등에 봉해지고,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도 공을 세워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봉해졌다. 태조가 영흥으로 은퇴하자 그도 풍양(豊壤)에 은거하면서 남정 · 북벌에서 많은 살상한 것을 크게 뉘우쳐 불교에 귀의하였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읍 안곡리에 있다. 시호는 양렬(襄烈)이다. 《화원악보(花源樂譜)》에 그의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초산(楚山)에 우imagefont 범과 패택(沛澤)에 imagefont긴 용(龍)이, 토운 생풍(吐雲生風)imagefont여 기세(氣勢)도 장(壯)헐시고, 진(秦)나라 외로운 imagefont슴은 갈 ㄱ곳 몰라 imagefont돗다"
출처 : 국어국문학자료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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