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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4.27

조선 초기 이지란은 여진족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연유로 조선인이 되었나요

조선 초기 이지란은 태조 이성계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출신이 여진족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연으로 인해 조선인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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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7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성부는 조선 수도이자 최대도시며 현 서울특별시의 전신이다. 이와 동시에 이를 관할하는 관청의 명칭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언론 등에서 '서울시'라는 단어를 지역으로서의 '서울특별시'를 일컫는 단어로 사용함과 동시에 '서울시청'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하기도 하는 것과 같은 용례이다.

    1394년 11월 21일 부로 조선의 수도가 되었고, 1395년 6월 6일에 한양부(漢陽府)에서 한성부(漢城府)와 양주군으로 분리, 개편된 이래 1910년 10월 1일 경성부로 개칭되기 전까지 만 515년 간 존속한 행정구역이다.
    한성부는 전주부, 경주부, 평양부 등 다른 부(府)와 다르게 도(道)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 행정구역이다. 상위 행정구역을 두지 않았다.

    한성부는 정2품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다스렸다. 해당 관직은 조선 초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라는 명칭으로 처음 등장했다가, 1466년(세조 12년)에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명칭이 바뀌고, 1567년(명종 22년)에 판윤으로 격상된 것이다. 본래 부윤은 종2품인데, 한성부는 수도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판서와 같은 정2품에 놓였던 것이다. 서울특별시장이 광역자치단체장임에도 불구하고 1961년부터 다른 광역시장이나 도지사들과 같은 차관급이 아닌 장관급으로 대우를 받는것과 같다.

    태조는 무학대사를 보내 한양 땅을 살펴 보게 했는데, 본래 왕십리에 수도를 삼으려고 하다가 한 노인이 지나가면서 소에게 "이 무학 같이 미련한 소야!" 라고 하는 것을 들은 무학대사가 깜짝 놀라 노인에게 물으니 "10리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도읍으로 삼을 땅이 있을 것이오." 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10리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과연 도읍으로 삼을 만했고, 그곳이 지금의 경복궁 자리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한양은 수도로 낙점되어 1394년 11월 21일에 천도를 단행한다.

    그 이듬해인 1395년 6월 6일에는 한양부를 옛 수도였던 개성부의 전례에 따라 한성부로 개칭하면서 옛 양주를 한양에서 분리시키며 한양도성 바깥에 있는 지역은 고양현과 양주군으로 편입시켰다. 현 용산구 둔지산을 경계로 서쪽은 고양군에, 동쪽은 양주군이 되었고, 양주군 관아는 지금의 광진구 광장동 일대에 두었다.

    태종 시절까지는 옛 개성부를 가리키던 말인 개경에서 따와 한경(漢京)이라고도 불렸다.

    출처: 나무위키 한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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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여진족이 였던 이지란이 향화(向化, 귀화)를 택한 때는 한창 활동할 시기인 41세 때였다고 합니다. 1371년(공민왕 20)에 여진 천호(千戶) 이지란은 휘하의 백호(百戶) 보개(甫介)를 보내어 향화 의사를 밝힌 후에 100호(戶)를 거느리고 고려로 왔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고려에서 무장으로 활동하였고, 주로 이성계 휘하에서 활동하였다.1380년(우왕 6)에 전라도 운봉(雲峰, 남원) 지역에 쳐들어온 왜구를 황산(荒山, 黃山)에서 크게 무찔렀고, 1383년(우왕 9)에는 단주(端州, 함경남도 단천)를 침략한 요동(遼東), 심양(瀋陽)의 초적을 몰아냈고, 곧이어 와서 노략질하던 여진 쿠바투[胡拔都]도 물리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1388년(우왕 14)에는 위화도회군에도 기여하였다고 합니다.고려 말 이성계가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키는 데 있어서 이지란은 매우 든든한 존재였다. 이성계는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수복에 협력하면서 동북면(東北面, 함경남도)에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행사하였고, 이지란을 휘하에 두게 되면서 그 일대에 거주하던 다른 여진족들까지도 회유, 복속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여진 정책의 방향은 조선 태조대까지도 지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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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보니 말씀 하신데로 이지란이 여진족이라는 내용은 사실인것으로 확인되지만 정확히 어떠한 사유로 조선인이 되었는지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이네요. 일부 학자들이 고려와 여진족 전쟁중에 포로가되어 조선으로 왔다는 설도 있지만 이또한 증거는 없다고 합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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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지란은 이성계를 처음 만났을 때 사냥한 사슴을 가지고 다투다가 서로에게 활을 쏘는 대결을 했는데 이성계가 이지란의 화살을 모두 피하는 신기를 보였고 이에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이성계의 의형제가 될 것을 자처합니다.

    이후부터 이지란은 이성계의 성인 이씨 성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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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성은 퉁[佟]. 본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 자는 식형(式馨).

    이지란 그는 남송시대 제일의 명장이었던 악비(岳飛)의 7세손이자 아버지는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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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초에는 건주여진족 부족장의 아들 출신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원나라의 천호라는 직위를 수행하였는데 원나라가 약해지고 망할 기미를 보이자 고려에 1백기의 병사와 함께 귀순

    합니다. 당시 이성계가 있는 지역으로 귀순하였는데 그때 이성계를 만나 다툼이 생겼고 서로 활로 내기를 하다가 이성계에게 활솜씨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의형제를 맺게 되고 그 이후 이성계를 형님으로 모시면서 많은 전투에서 공적을 세웁니다. 이성계를 끝까지 따라 다녔고

    조선의 건국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되고 이성계에게 무한 신뢰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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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성은 퉁[佟]. 본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 자는 식형(式馨).

    그는 남송시대 제일의 명장이었던 악비(岳飛)의 7세손이자 아버지는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이다.

    이성계와 결의형제를 맺었다.

    부인은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姜氏)의 조카딸인 혜안택주 윤씨(惠安宅主尹氏)이다.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아 천호가 된 후 1371년(공민왕 20) 부하를 이끌고 귀화, 북청(北靑)에 거주하면서 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 원나라의 멸망을 미리 짐작하고 공민왕 4년에 고려에 귀순할 뜻을 밝히고 북청지역에서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자 이성계의 영향을 받은 이지란도 공민왕 20년(1371) 2월에 정식으로 고려에 귀화했다. 그때 나이 41세로 이성계의 영향이 컸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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