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충흔 전문가입니다.
진사 유약은 인공적인 염료나 안료를 섞지 않고도 무기 화학 반응과 물리적 광학 현상만으로 강렬한 붉은색을 구현해내는 한국 전통 도자기의 정수입니다. 그 핵심 원리는 유약 속에 포함된 구리(Cu) 성분이 가마 안에서 겪는 상태 변화에 있습니다.
도자기를 구울 때 가마 안의 산소 공급을 제한하면, 산소가 부족한 '환원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이 환경에서 유약 속의 구리 이온은 산소를 잃고 환원되어, 수 나노미터(nm) 크기의 미세한 금속 구리 나노 입자로 석출됩니다. 이 입자들이 유약 층 안에 고르게 퍼지게 되는데, 여기서 붉은색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물리 현상인 '표면 플라즈몬 공명이 발생합니다.
금속 나노 입자 표면의 자유 전자들은 특정 파장의 빛과 만날 때 집단적으로 진동하게 됩니다. 구리 나노 입자의 경우, 가시광선 영역 중 청록색 부근의 빛을 강하게 흡수하고 산란시키는 특성을 가집니다. 이렇게 특정 파장의 빛은 흡수되고 반대되는 보색 관계의 붉은색 파장의 빛은 우리 눈에 투과되어 들어오기 때문에, 도자기가 선명하고 깊이 있는 붉은빛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진사 유약의 붉은색은 화학적 색소의 색이 아니라, 나노 크기의 무기 금속 입자가 빛과 반응하여 만들어내는 정교한 광학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약의 두께와 구리 입자의 크기, 분포 정도에 따라 발색이 달라지기 때문에 매우 섬세한 제어가 필요한 고난도의 기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