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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재규어24723.07.10

흥선대원군은 왜 쇄국정치를 했나요?

안녕하세요? 일본이나 다른나라들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발전을 하기 시작 했는데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치를 하여 개혁을 막았습니다. 왜 쇄국정치를 하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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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 쇄국정책의 큰 이유는 서양과 있던 두번의 전쟁때문으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입니다.

    긴 시간동안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던 병인양요와 미국과 전쟁을 벌인 신미양요가 합쳐지며 서양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변하게 되며 쇄국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에서 세도 정치가 행해지던 19세기에, 서양에서는 산업 혁명을 거쳐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이룩한 열강들이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확보하기 위해 군함을 앞세워 아시아 여러 나라에 경쟁적으로 침입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서양 세력의 물결은 조선에도 밀려왔습니다. 그러니까 대원군은 조선이 외세의 침투로 위기를 맞고 있던 시기에 집권한 것입니다.


    이미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부터 프랑스 선교사가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전개했으며, 교세가 확장되어 천주교 신자는 점차로 늘어나 2만여 명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또한 의주나 동래 등의 지역을 통해 서양 상품이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원군이 취한 대책은 열강의 통상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서양 상품의 유입을 엄하게 금지시켰습니다.


    사실 대원군도 처음에는 서양과의 교섭을 시도했습니다. 천주교를 관대하게 대하면서 프랑스 선교사의 알선으로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여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견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교섭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때맞춰 청에서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유생들까지 강력하게 들고 일어나자, 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게 됩니다. 이를 병인박해라고 부릅니다. 병인박해로 인해 아홉 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수천 명의 천주교 신도들이 처형당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는 선교사 처형을 문제 삼아 침략해 왔습니다. 프랑스는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Roze) 제독이 이끄는 7척의 군함을 파견하여 강화읍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이 항전의 의지를 단호하게 표명했고 한성근, 양헌수 부대가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분투하여 프랑스군을 격퇴시켰습니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 합니다(1866).

    2년 뒤에는 쇄국의 의지를 더욱 확고하게 만드는 기괴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통상을 거절당하자 충청도에 있는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입니다. 오페르트 일행은 러시아 군병이라 자칭하면서 총칼을 휘둘러 지방 관헌조차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둠을 타서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지요. 군수와 묘지기 및 몇몇 주민이 이를 막으려 했지만, 무장한 이들을 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날이 밝아 주민들이 몰려오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들은 파낸 관곽(棺槨)까지 그대로 버려두고 도망갔습니다. 이 사건은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조선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조선의 문은 더욱 굳건히 빗장을 지르게 되었습니다. 미국과도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가 국경을 침입하여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다가 평양 군민(軍民)과 충돌하여 미국 상선이 침몰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이를 구실로 삼아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 제독이 이끄는 5척의 군함으로 강화도를 공격했습니다. 병인양요 이래 국방력을 강화해 온 조선은 이에 맞섰고,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 수비대가 광성보와 갑곶 등의 지역에서 미국 군함을 격퇴시켰습니다. 이를 신미양요라 합니다(1871).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을 물리친 대원군은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는 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이를 온 국민에게 주지시키기 위해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 올 때[양이침범 : 洋夷侵犯]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하는 것이요[비전즉화 : 非戰則和],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주화매국 : 主和賣國]. 나의 만년 동안 이어질 자손들에게 경계하노라."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문호를 개방하여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쇄국 정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근대화는 뒤처지게 된 것입니다. 그럼 이쯤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까요. 이러한 양요는 왜 하필 강화도에서 일어났을까요?


    강화도는 바다를 통해 수도 서울로 들어오는 전초기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격하려는 쪽과 이를 막으려는 쪽이 강화도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서양은 이곳을 차지하여 조선 정부에게 압력을 가하고 여차하면 서울로 진격하려 했던 것이고, 조선 또한 강화도는 외세를 막아야 하는 중요한 거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