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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거북이38
활달한거북이3823.07.31

지금도 있는 향교, 조선시대에는 향교가 어떤 역할 했나요?

사촌형님이 대구 향교에서 결혼식을 했습니다.

전통 혼례로 결혼을 했구요~!

지금은 한문 등 예절 교육을 배우고, 전통 혼례를 하고 있는

향교는 과거 조선시대에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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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ㆍ조선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으로 교궁(校宮)ㆍ재궁(齋宮)이라고도 한다. 전국 각지에 설치하였던 지방의 관학(官學)인데 지방의 민풍(民風)과 예속(禮俗)을 순화하고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지방관청의 관할 아래에 두었으며 제향(祭享)과 교육의 양대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향교는 고려에서 비롯되어 조선에 계승된 교육기관으로서 고려의 학제(學制)는 당(唐)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중앙에 국자감(國子藍)ㆍ동서학당(東西學堂)을 두고 지방에는 국자감을 축소한 학교를 설치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1392년 (태조 1) 교학(敎學)의 쇄신을 꾀하기 위해 모든 도(道)의 안찰사(按察使)에 명하여 학교의 흥폐로써 지방관 고과(考課)의 법으로 삼고, 이에 부(府)ㆍ목(救)ㆍ군(郡)ㆍ현(縣)에 각각 1교씩을 설치하여 점차 전국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향교는 학제상(學制l上) 중등교육기관이라 할수 있으며 그 교육내용의 수준으로 볼 때 교육과정이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성균관(成均館)에 비해 반드시 낮은 것은 아니었으나, 성균관에 입학하여 면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과(小科)에 합격해야 했고, 향교의 생도는 대부분 소과에 응시하기 위한 준비과정에 있었으므로 향교는 성균관에 비해 하위 단계의 교육기관이었다. 또 교육내용면에서 볼 때 항교는 순수한 유학교육기관이었는데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있어서 정부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고급행정직을 유학으로 수양된 인재로 충당하였고, 향교는 유학 위주의 문과 시험을 위한 준비기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항교는 중앙의 사학(四學)과 같으며 여기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科擧)에 합격한 생도는 생원(生員)ㆍ진사(進士)의 칭호를 받고 다시 성균관에 가게 되었으며, 다시 문과시에 응하여 고급관위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므로 조선 중기 이후에는 향교가 과거 준비장으로 되고 사학(私學) 기관인 서원(書院)이 발흥하게 되자 점차 쇠미(衰微)해졌으며, 1894년 (고종 31)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이름만 남아 문묘(文蘭)를 향사(享祀)할 따름이었다. 향교에는 문묘ㆍ명륜당(明倫堂) 및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현(先賢)ㆍ선철(先哲)을 제사하는 동무ㆍ서무와 동재(東齋)ㆍ서재(西齋)가 있다. 향교의 교과목은 『소학(小學)』 과 사서(四書)ㆍ오경(五經) 그리고 『근사록(近思錄)』 등이었으며, 생도들의 재학 연령은 17세 이상 40세 이하로 제한되어 있었으나 16세기 이후로는 상한선이 지켜지지 않았다. 생도의 수는 부ㆍ목에 90명, 도호부(都護府)에 70명, 군에 50명, 현에 30명이었고 직원으로는 교수(敎授)와 훈도(訓導) 각 1명을 두었다. 한편 향교에는 국가에서 5~7결(結)의 학전(學田)을 지급하여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을 충당하였다.

    향교는 초기부터 그 기능이 활발한 편은 못되었고, 16세기 경부터 수용 인원이나 사생(師生)의 질적인 면 등에서 현저히 부진 상태를 드러내다가 임진(壬辰)ㆍ병자(丙子) 양란을 겪은 뒤에는 교사(校舍)의 손실, 재정의 궁핍 등이 더해져 더욱 허소(虛疏)한 상태가 되었으며, 특히 서원의 성세(盛勢)에 압도되어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양란을 겪은 뒤 인종 연간에는 유생들이 사력(私力)을 내어 향교를 영건(營建)하면 포상하기도 하고, 효종 때에는 향유(鄕儒))로서 각 향교의 향교안(鄕校案)에 이름이 오르지 않는 자는 과거 응시를 허락하지 않도록 하는 등의 부흥책을 써보았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출처 : 종교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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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향교의 약할은 크게 두가지 인데 하나는 교육적 역할과 다른 하나는 제사를 지내는 기능 입니다. 향교는 성현을 배향하는 문묘와 학생들이 공부하는 강학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명륜당은 교생들이 강학하는 곳입니다. 조선의 향교는 고려와는 달리 반드시 문묘를 교육 공간과 분리하여 설치함으로써 공자를 비롯한 유교사상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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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향교는 중앙의 사학과 같으며 향교 입적자에게만 과거 응시의 자격이 주어졌고 소과에 입격하면 생원과 진사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입학해 수학할 자격이 주어졌으며, 대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을 나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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