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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30

을사오적 5명이 누구이며 무슨 짓을 했나요?

을사오적이라고 해서 매국노 중의 매국노로 평가받는 인물들이 있잖아요.

그들이 누구이며, 정확하게 어떤 행위로 인해 그런 평가를 받게 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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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7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입니다. 을사늑약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입니다. 을사오적은 1875년 일어나게 된 조선의 일본에게서의 독립을 지켜내기 위한 저항운동입니다. 이때 조선의 지도층은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고, 이것이 바로 을사늑약입니다. 하지만 을사늑약은 단순히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것은아니며 이전의 1873년, 조선에서는 광무개혁이 일어나면서 양반제도가 폐지되고, 서구적인 개혁과 교육이 이뤄졌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사회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지도층은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더 나은 선택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이용해 조선을 더욱 압제하고 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조약의 내용에 따라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고, 나중에는 1910년에는 조선을 병합해 식민지로 만들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을사늑약은 일본의 조선 압제와 침략의 시작점으로 여겨지며, 그로 인해 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 순금킹 시계퀸
    순금킹 시계퀸23.08.30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할 때 이에 찬성 또는 묵인하여 조인을 거들어준 다섯명입니다.


    매국노 그 5명의 이름은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의 다섯 대신을 가리킵니다.



  • 안녕하세요. 송민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사오적이란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한국 침략 과정에서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할때 당시 한국 측 대신 가운데 늑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을사늑약은 이들을 통해 조선과 일본간에 공식적으로 처리되었고 국제사회가 일제의 조선 지배를 합법적으로 보게만드는데 일조한 사람들로써,

    박제순, 이지용,이근택, 이완용,권중현 위 다섯명을 말합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사오적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나라의 외교권을 팔아 넘긴 5명의 대신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을 말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사조약(을사늑약)에 찬성해 서명한 다섯 명의 대신들을 가리킨다.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다.

    풀이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이웃 나라들과 전쟁을 벌였다. 1894년에는 청일 전쟁, 1904년에는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두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일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본격적으로 정치에 간섭할 기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 17일에 주조선 일본군 사령관과 헌병들을 데리고 어전 회의(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의논하는 자리)에 들어와 조약을 맺자고 강요했다. 회의장 밖에서는 총칼로 무장한 일본 군인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당시 대한 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은 조약에 반대했지만 일본에 정면으로 맞서지는 못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다며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채 조약에 관한 일을 신하들에게 떠넘겼다. 오늘날의 국무총리와 같은 참정대신 한규설은 끝까지 강하게 반대했지만, 회의장에 있었던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등 다섯 명의 대신들이 조약서에 서명했다. 이후 이들은 ‘을사오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들이 서명하여 을사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 제국은 외교에 관한 모든 일을 할 때 일본의 허락을 받게 되었다. 일본은 통감부를 세우고 외교뿐 아니라 정치까지 일일이 간섭했다. 그 공로로 을사오적은 승승장구했다. 이들은 1910년에 한일 강제 병합이 이루어지자 일왕으로부터 은사금을 받았다. 은사금이란 일본이 대한 제국을 합병할 때 도움을 준 데 대해 고맙다는 뜻으로 준 돈을 뜻한다. 또한 이들은 일본의 벼슬을 받고 귀족의 작위까지 얻었다.

    심화

    을사조약(을사늑약) 체결 이후 전국 곳곳에서는 을사오적을 규탄하고 일본과 맞서 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언론인인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글을 써서 을사오적을 비판했고, 민영환과 조병세 등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을사조약(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렸다.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싸웠으며, 한양의 상인들이 을사조약(을사늑약)에 항의하며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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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사오적"은 한국어에서 일본 식민 지배에 대항하며 저항한 독립 운동가들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이 용어는 조선시대 의병이자 독립 운동가인 윤봉길의 육영문사 사건(을사사 사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러나 "매국노"라는 용어는 대부분 일본의 지배에 협조하거나 혜택을 취하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을사오적"인 인물들이 "매국노" 중의 "매국노"로 평가받는 경우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일 수 있습니다:

    1. 협력과 배반의 경계: "을사오적"으로 평가받는 인물 중에서도, 독립 운동을 주도하거나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펼치면서 민족적 이익을 추구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일본의 지배 체제에 협력하거나 혜택을 취하려 한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후자의 경우는 민족적인 이익보다 개인적인 이익을 우선시하는 태도로 인해 "매국노"로 비판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2. 자국민에 대한 배신: "을사오적"인 인물들이 민족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동안, 이들이 지지를 받던 자국민들에게서 이해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는 민족 운동이 어려운 환경에서 진행되었을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자국민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행동하거나 결정을 내렸을 때 비난을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3. 정치적 이해 차이: 독립 운동 내에서도 의견의 차이가 있었고, 특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등의 정치적 이념을 향한 태도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념적 차이로 인해 어떤 인물들은 다른 인물들로부터 "매국노"로 비난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4. 역사적 변천: 일부 "을사오적"인 인물들이 시대별로 평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특정한 시기의 상황이나 맥락에서 독립 운동을 주도했으나 나중에 협력적인 행동을 한 경우, 그 평가가 변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을사오적"인 인물들 중에서도 "매국노"로 비난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과 정황을 고려하며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사오적은 1905년 을사늑약에 찬성해 서명한 다섯 대신으로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입니다.

    조선 말기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 무력행사를 통해 청나라 세력을 꺾고 다음의 경쟁상대인 러시아를 러일전쟁으로 격파, 미국, 영국 등 열강들과 침략 상호 묵인체제를 구축해 조선의 실질적 침략인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늑약을 체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