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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우람한스컹크18323.08.21

인조와 소현세자의 사이가 틀어진 계기는 무엇인가요?

청나라에 인질로 있었던 소현세자는 귀국이후에 인조와 사이가 좋지않았고 그가 죽고나서 그의 아들을 세손으로 삼지않고 그의 가족을 풍비박산낼 정도였는데 이들이 사이가 틀어진 계기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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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니 이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이유가 계기가 되지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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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이후부터 자기 자신에게 치욕(삼전도의 굴욕)을 준 청나라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멀어지기 시작했고, 실제로 인조를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추대하려는 역모 사건이 일어나자 더더욱 소현세자를 미워하게 되었으며 소현세자를 독살한 게 아버지 인조다 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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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인들은 쿠테타를 일어켜 인조를 왕위에 올리고 정권을 장악합니다..

    하지만 곧 후금으로 부터 침략을 받습니다.정묘호란입니다


    가까스로 강화로 후금군이 물리쳤지만 후금에 대한 조선의 냉대는 계속되고 급기야 청(후금)으로 부터 다시 침입을 받습니다 병자호란이라 부릅니다.조선은 싸움도 제대로 못해보고 남한산성에 인조가 고립되게 됩니다.인조의 서인정권은 너무나 무능력했기 때문에 결국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치욕을 봤습니다.가까스로 왕조는 이어지게 됩니다.이때 인조의 장자와 둘째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가게 됩니다.


    청나라에서 8년동안 소현세자는 청나라가 강국임을 인정하고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 상당히 많은것을 배웁니다. 서양쪽 문물에도 깊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8년이 지나고 다시 귀국길에 오른 소현세자는 많은 지식과 서양문물을 소개하지만 인조는 이런 소현세자의 태도가 상당히 거슬립니다.

    인조는 청나라부터 삼전도의 치욕을 겪었기 때문에 청나라를 상당히 싫어했는데 그보복을 이루어야할 소현세자는 그반대로 청나라에게 상당히 긍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얼마못되서 갑자기 병사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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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의 입지는 굳건했고 인조가 몸이 안좋아 세자가 일시적으로 귀국했는데, 청태종은 세자를 위해 직접 연회를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극심한 분노와 질투를 느끼며 세자가 자신의 왕 자리를 뺏을지 모른다는 의심으로 사이가 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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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는 청나라를 삼전도의 굴욕을 하게 만든 원수의 나라라고 생각 하느데 반해 소현 세자는 청나라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심지어 돈도 많이 벌게 되고 청나라의 서양인들과도 친분을 두터이 하니 인조 입장에서는 소현 세자가 이뻐 보이지 않았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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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소현세자와 인조의 사이가 틀어진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있을 때 청나라의 문화와 문물을 접하고, 청나라의 위세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로 인해 소현세자는 조선의 국력이 청나라에 비해 열세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고, 조선의 개혁을 꼭 이루고 싶었습니다.

    • 인조는 소현세자의 개혁에 반대했습니다. 인조는 조선의 전통을 지키고 싶었고, 청나라의 영향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 소현세자는 인조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했습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첫 번째 아들이었지만, 인조는 자신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소현세자는 이로 인해 인조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소현세자와 인조의 사이는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소현세자는 30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인조는 그의 아들인 경종을 세손으로 삼지 않고 봉림대군을 세손으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 소현세자의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추천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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