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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드려요❤️
답변 감사드려요❤️23.12.19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발전했나요?

고대 그리스는 민주주의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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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대 그리스는 단일 국가가 아니라 수백여 개에 달하는 도시국가들이 점점이 흩어져 서로 경쟁하고 공존하는 구조였다. 다른 지역들처럼 단일 왕정이나 정치권력을 형성하지 못했던 이유는 산지가 많고 강, 협곡, 산맥 등으로 잘게 갈라진 지형이 많은 그리스의 특성상 아무래도 주위를 압도할 세력이 탄생하기 어려웠던 것도 한 몫했다. 이렇게 그리스에서는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서로 난립하면서 경쟁했는데, 이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통치 구조가 발생했다. 사실 현대인들이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역사적으로 보면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오히려 굉장히 불안정한 제도였다. 당시에는 오히려 왕정이나 제국이 훨씬 더 안정적인 국가 운영 시스템이었으며, 그 로마 공화정 역시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걸출한 천재가 등장한 이래 로마 제국으로 탈바꿈하면서 제정으로 전환된다. 무엇보다 당대 기술력 수준으로는 웬만큼 덩치가 큰 나라는 민주주의를 할 수조차 없었다. 아테네야 도시국가 수준이니 사람들이 일일이 모여서 투표하고 하는 게 가능하지 덩치가 커지면 사람들이 모이기 어렵다. 모이더라도 그 모인 인구들이 투표한 것을 옮기고 일일이 확인하여 개표하는 등의 문제도 커진다. 그리스는 하나의 황제나 왕이 위에서 통치하는 구조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세금과 시민의 의무를 질 수 있는 성인 남성에게만 한정된다는 한계점은 있었지만 이후 꾸준히 발전하며 현대 사회의 정신적 틀을 만들었다는 의의를 남겼다.

    고대 그리스에서 최초로 민주주의가 발생한 곳은 아테네였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원래 아테네도 기존에는 왕정이었지만, 기원전 6세기경 왕의 폭정에 지친 아테네인들이 왕을 몰아내고 귀족들이 다스리는 과두정으로 바꿨고 나중에는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주정으로 발전했다. '아티카 지방의 패자이자 유력 대도시던 아테네가 민주주의 체제로 바뀌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의 폴리스들도 모두 민주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어서 스파르타의 경우 세습되는 두 가문에서 왕을 2명씩 배출하면서 왕정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했다.

    무력을 숭상하던 스파르타는 유독 정치체제가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과 유별날 정도로 차이가 심했다. 스파르타는 2개의 마을이 합쳐져 만들어진 도시였기에 그 이래로 2명의 왕을 섬겼다. 각각 아기아다이 가문과 에우리폰티다이 가문에서 1명씩 가장 먼저 태어난 남자아이에게 왕위를 물려줬으며 왕위는 세습직이었다. 스파르타의 왕은 최고 사제직을 겸했고 전쟁을 선포할 권리도 있었다. 허나 스파르타 왕권은 날이 갈수록 쪼그라들었는데, 외교권은 페르시아 전쟁 이후로 5인의 선출직으로 구성된 에포로스에게 넘어갔고 내정 역시 60세 이상의 장로 28명으로 구성된 장로회의 게루시아에게 넘어갔다. 결국 왕은 종교 업무를 제외하면 군대 최전방에서 싸우는 걸 빼고 거의 할 일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만으로 남았다.

    '에포로스'는 1년마다 시민들의 선거로 뽑혔고, 나중에는 왕보다도 더 강력한 세력을 가진 스파르타의 최고 의결 기구로 떠올랐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1년마다 갈아치워졌고 재선이 불가능했던 탓에 퇴임 후 보복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5명의 에포로스들은 장로회의, 즉 게루시아와 함께 국정 대소사를 총괄했다. 반면 민회 에클레시아의 경우, 안건을 상정할 수도 없었고 에포로스가 제시한 안건에 투표만 가능해서 기타 그리스 폴리스들에 비해 권한이 확연히 적었다. 에클레시아에서 통과된 안건도 다시 에포로스와 게루시아의 상의 끝에 시행되었다. 워낙 에포로스와 게루시아가 보수적인 집단이었던 탓에 스파르타의 정책 실행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느렸다. 대신 권력이 분립되고 상호 견제되었기에 체제 안정성이 매우 탁월했고, 대중 독재와 폭군을 모두 방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