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땅속의 말똥구리
땅속의 말똥구리23.05.18

거북선의 개발은 어떤 계기로 만들어진 것일까요?

이순신 장군님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건 한국사람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럼 이 거북선을 만든 계기는 어떤것일까요? 계속적인 학습보다는 순간적인 영감 같은데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8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대용은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이자 발명가다. 거북선과 판옥선의 단점을 보완해 칼과 창을 빽빽이 꽂을 수 있는 창선도 만들었다. 해추선이라는 쾌속정까지 만들어낸 조선 기술자였다.

    나대용은 임진왜란에도 참전해 큰 공을 세웠다. 사천해전에서는 탄환을 맞았다는 사실이 난중일기에 기록돼 있다. 우리 정부도 나대용의 업적을 기려 해군이 운용하고 있는 잠수함 한 선단의 이름을 나대용함으로 붙였다.

    나대용함은 최첨단의 잠수함이다. 1200t급에 길이 56m, 폭 6m에 이른다. 물속에서 음향까지 탐지해 표적을 찾아내고 추적까지 하는 잠수함이다. 유도탄 미사일을 쏴 수십 마일 떨어진 표적을 명중시킨다.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에 나대용의 생가가 있다. 생가에서 3㎞ 떨어진 대도리 산기슭에 묘소도 있다. 생가에서 가까운 사당 소충사(昭忠祠)에는 나대용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조그마한 거북선과 함께 동상도 세워져 있다.

    나대용의 호는 체암(遞菴). 나주와 광주를 잇는 도로 체암로가 나대용의 호를 따서 이름 붙인 도로다. 나대용의 태 자리 나주 문평을 지난다. 고막원역 앞 삼거리에서 광주 광산구 양동까지 18.6㎞를 잇는다.

    소충사에서 해마다 과학의 날에 나대용 장군 추모제가 열린다. 거북선 발명을 기념해 과학의 날에 추모제를 열고 있다. 나대용함의 해군 승조원들도 참석한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추모식이 취소돼 열리지 않았다.

    소충사 앞에 방죽골을 복원하고 대형 거북선이라도 한 척 띄우면 좋겠다. 현재 나대용 동상과 함께 세워져 있는 거북선 조형물은 너무 작다. 동상 주변을 파 물을 담아둔 건 좋지만, 나대용과 거북선의 무대가 드넓은 바다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또한 개울에 지나지 않는다.

    나대용 생가에서 멀지 않는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에 조선을 설계한 삼봉 정도전(1342∼1398)의 유배지도 있다. 정도전은 백성이 먼저라는 민본정치의 주창자였다. 나라도, 임금도 백성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논리다. 민본정치는 요즘의 혁신, 개혁과 상통한다.

    고려 공민왕이 죽으면서 신흥사대부들의 개혁정치가 좌절됐다. 다시 보수세력이 고개를 쳐들 때다. 정도전은 원나라를 가까이하고 명나라를 멀리하는 친원반명(親元反明)을 거부했다. 정도전이 원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영접사로 임명됐다.

    정도전은 '사신을 접대하느니 차라리 그 놈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며 거절했다. 유배길에 올랐다. 불 같은 성격 그대로다. 그는 34살 때부터 36살 때까지 3년 동안 나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출처: 오마이뉴스 거북선은 언제,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 전에 수군이 정비되면서 판옥선을 개조하여

    왜적의 침략과 왜란을 대비하기 위해 건조한 것으로,

    임진왜란 중 사천 해전에 첫 출전한 이래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하기까지 일본 수군과의 16전 16승을 하는데

    크게 기여한 일본 수군의 공포의 전함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북선과 관련하여 임진왜란의 와중에 이덕홍이 제작을 건의한 ‘귀갑선(龜甲船)’이 주목됩니다. 그는 왜적들의 장기가 조총으로 대표되는 ‘철환(鐵丸)’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왜적들이 성세를 올리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덕홍이 생각하기에 왜적의 ‘철환’을 막는 방법은 왜적들이 육지에 올라서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책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두 가지를 고안하였습니다. 하나는 왜적의 배가 육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포구에 ‘침수진목전(沉水眞木箭)’을 설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귀갑선’의 제작이었습니다.


    이덕홍이 생각한 ‘귀갑선’의 제도는 다음과 같았다. “귀갑선의 제도는 등 부분에 창검을 부착하고 머리 부분에 쇠뇌(伏弩)를 숨겨 두고, 허리 부분에 작은 판옥(板屋)을 만들어서 사수(射手)가 그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게 합니다. (판옥의) 곁으로는 쏘는 구멍[射穴]으로 통하고, 아래로는 배의 중심부에 통하게 한 다음, 가운데에 총통(銃筒)과 큰 도끼[大斧]를 싣습니다. 그리하여 때려 부수거나 포를 쏘아 대고, 쏘거나 들이치면 적들이 비록 많이 몰려오더라도 반드시 (우리 편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이순신의 거북선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북선은 뛰어나고 독창적인 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거북선은 그 이전의 배무이(선박건조) 기술의 바탕 위에서 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어 온 배무이 기술이 거북선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통일신라 시기의 장보고의 해상 활동이나 고려 왕조의 활발한 무역 활동은 모두 훌륭한 배의 존재를 전제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고려시기 배무이의 전통이 조선왕조에 계승되어 판옥선과 거북선을 출현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조선의 싸움배는 판옥선이 주축이었습니다. 그것은 배 위 갑판을 덮어 다시 그 위에 누각이나 다른 건조물을 세운 구조를 가진 배였습니다. 즉 2층 구조로 이루어져 1층에서는 노를 젓고, 2층에서는 전투를 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갑판 아래서 노를 젓는 노군들을 적의 화살이나 화포로부터 직접 공격당하지 않게 지붕을 덮은 것이었는데, 거북선은 이러한 판옥선 위에 다시 덮개를 씌운 것이었습니다. 적들이 아군의 배에 뛰어들어 발을 붙이지 못하게 고안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