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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9

조선시대 안용복은 어떤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에 있었던 안용복이라는 인물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의 일생은 어떠했는지

업적은 무엇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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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 어부이자 민간외교가. 울릉도에 출어했다가 일본 어선을 발견하여 이를 문책하고 일본에 가서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동래부 출신으로 동래 수군으로 들어가 능로군(能櫓軍)으로 복무하면서 왜관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 말을 잘하였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서 고기잡이 하던 중 이곳을 침입한 일본 어민을 힐책하다가 일본으로 잡혀갔다. 일본에서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강력히 주장하여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書契)를 받아냈다. 이를 가지고 돌아오던 중 쓰시마도주[對馬島主]에게 빼앗겨 서계가 죽도(竹島)가 일본땅이므로 고기잡는 것을 금지시켜 달라는 내용으로 위조되어 조선에 들어왔다.

    이에 조선에서는 울릉도는 조선의 땅임이 명백함을 밝히고 1694년 일본의 무례함을 힐책하는 예조의 서계를 전달하였다. 이후 안용복은 1696년(숙종 22) 박어둔(朴於屯)과 다시 울릉도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일본 어선을 발견하고 송도(松島:독도)까지 추격하여 정박시킨 후 조선의 바다에 침범해 들어와 고기를 잡은 사실을 문책한 다음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道監稅官)이라고 자칭하고, 일본 호키주[伯耆州: 島根縣]에 가서 번주(藩主)에게 범경(犯境)의 사실을 항의하여,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이듬해 일본 막부(幕府)는 쓰시마도주를 통하여 공식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일본의 출어금지를 통보해 왔다. 안용복은 나라의 허락없이 외국을 출입하여 국제문제를 야기했다는 이유로 조정에 압송되어 사형까지 논의되었으나 지사 신여철(申汝哲) 등이 ‘나라에서 하지 못한 일을 그가 능히 하였으니 죄과와 공과가 서로 비슷하다’고 하여 귀양에 처해졌다. 이후 울릉도에 대한 분쟁이 없어져 그의 공로가 크다고 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용복 [安龍福]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19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동래부 출신으로 동래 수군으로 들어가 능로군으로 복무하면서 왜관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말을 잘했고 1693년 울릉도에서 고기잡이 하던 중 이곳을 침입한 일본 어민을 힐책하다 일본으로 잡혀갔으며 일본에서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해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받아냈습니다.

    이를 가지고 돌아오던 중 쓰시마도주에게 빼앗겨 서계가 죽도가 일본땅이므로 고기잡는 것을 금지시켜달라는 내용으로 위조되어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이에 조선에서 울릉도는 조선의 땅임이 명백함을 밝히고 1694년 일본의 무례함을 힐책하는 예조의 서계를 전달, 이후 안용복은 1696년 박어둔과 다시 울릉도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일본 어선을 발견하고 송도까지 추격해 정박시킨 후 조선의 바다에 들어와 침범해 들어와 고기를 잡은 사실을 문책한 후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 자칭하고 일본 호키주에 가서 번주에게 범경의 사실을 항의하여 사과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일본 막부는 쓰시마도주를 통해 공식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 일본의 출어금지를 통보했고 안용복은 나라의 허락없이 외국을 출입하여 궂제문제를 야기했다는 이유로 조선에 압송되어 사형까지 논의되나 지사 신여철 등이 나라에서 하지 못한 일을 그가 능히 하였으니 죄과와 공과가 서로 비슷하다고 하여 귀양에 처해지고 이후 울릉도에 대한 분쟁이 없어져 그의 공로가 크다고 할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용복은 조선 후기 어부였습니다. 두 차례 일본으로 가서 호키주 태수와 에도 막부를 상대로 울릉도와 독도에서 일본의 불법 고기잡이에 항의하여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 조정으로부터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다는 범죄자로 비난을 받았으나,외교적 분쟁을 일으키고 범죄를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유권 분쟁을 해결하는 데 큰 공로가 있다는 점에서 사형이 아닌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18세기 이후 재조명되어 근대에는 애국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강호 수역의 상징적인 인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용복(安龍福)은 숙종 대 사람으로 현재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좌천동에 거주하였다. 신분은 사노비였으며, 주인은 서울에 거주하였다. 당시 좌천동에는 초량 왜관으로 이주하기 전의 왜관인 두모포 왜관이 있었다. 이러한 주거 환경 덕분에 안용복은 일찍이 일본어를 습득할 수 있었다. 그는 동래부에 설치된 경상 좌수영의 수군 병졸로서 전선의 노를 젓는 병졸이었으며, 어업을 생업으로 하였다. 안용복은 1693년과 1696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가서 울릉도 및 독도의 조선 영유권을 주장한 인물로서 조선 후기 『성호사설(星湖僿說)』의 기록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출처:부산역사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