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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성리학은 사회 경제적 변동애 따른 통치 체제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일부 유학자들이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을 위해 실사구시 학문을 추구합니다. 특히 남인 실학자들 가운데 정약용 같은 인물은 정조로 부터 신임을 받아 자신의 사상을 실제로 통치에 반영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한강 배다리, 수원 화성 거중기 등이 그렇죠. 그러나 정약용 등 경세치용 학파는 조선의 근본적 문제를 토지제도의 모순과 자영농 육성에서 찾아 해결 방안을 고민했으나 현실 정치와 거리가 있어 한계를 드러냅니다. 또한 이용후생을 주장하는 실학자들도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는 제한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