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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3년 가을- 겨울 사이에 발생한 후삼국시대의 전투로 고창 전투와 더불어 후삼국시대 말기 후백제의 기세를 꺾어버린 전투입니다.
고창 전투의 대승 이후 고려와 신라는 삼한 통일 경쟁에서 우위에 서며 후백제를 조여오는데 이에 후백제는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수군을 동원해 예성강 전투를 개시, 고려의 수군 전력을 약화시키고 일시적으로 눌렸던 기세를 푸는 등 어느정도 성과를 보았지만 왕건의 제거라는 소기의 목표 달성에는 실패, 결정적으로 934년 7월 경 멸망한 옛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잔존 왕족과 대신을의 귀부를 받아들이며 인적인 스펙트럼을 넓여가는 동시에 신라를 보호국화 하는 등 날로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934년 9월 왕건은 후삼국 통일 쟁탈전에서 잡은 우세의 쐐기를 박고 1년 전 신라 전선에서 있던 전투를 되갚고자 병력을 이끌고 직접 운주성으로 내려가는데 이에 질세라 견훤 역시 노구의 몸을 이끌고 직접 출정을 감행, 그러나 고려군의 위세가 상당하여 견훤은 화친을 정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유필금의 유격대가 기습을 가해 후백제군이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전의를 상실한 후백제군은 후퇴할수밨에 없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는 병력 3000여 명이 전사하는 한편 동시에 용장 상달과 최필, 군의 훈겸, 술사 종훈이 포로로 잡히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전투가 있은지 6개월만에 후백제는 견신검의 모반이 일어났고 이후 신라는 경순왕의 고려 귀순으로 신라는 고려에 합병되었고 후백제는 이 전투로 급격한 쇠락을 겪어 결국 견훤의 고려 귀순과 더불어 일리천 전투를 끝으로 멸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