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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푸른점
창백한 푸른점24.03.03

33인은 손병희 선생외 누가있죠?

민족대표라고 부르는 33인은 대표적으로 손병희 성생님을 주축으로 말을 하는데요 손병희 선생님 외에 33인은 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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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민족대표 33인이 누구인지 궁금한 것 같습니다.

    손병희 선생 외에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한용운, 백용성,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가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민족대표 33인은 종교별로 나누어 대표를 선정하여 개신교 인사 16명, 천도교 인사 15명, 불교 인사 2명입니다.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권동진 권병덕 길선주 김병조 김완규 김창준 나용환 나인협 박동완 백용성 박준승 신석구 신홍식 양전백 양한묵 오세창 오화영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종일 이종훈 이필주 임예환 최성모 홍기조 홍병기 최린 정춘수 박희도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다음은 손병희 선생 외 33인의 리스트 입니다. 참고 바랍니다.

    손병희: 천도교 측 수장. 1922년 사망.

    • 이승훈: 개신교 측 수장이자 교육자. 1906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음. 1930년 작고. 33인 중 가장 늦게 풀려남.

    • 한용운 불교 대표. 공약 삼장 작성. 말년에는 중풍에 시달리다 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사망.

    • 동진: 1882년 일본 망명 후 1905년경(?)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신간회 부회장으로 광주학생운동 참여. 증손 권혁방은 33인 유족회 회장 재임.

    • 권병덕: 1894년 손병희와 함께 동학 농민 운동에 참가,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감사원장, 선도사 등을 역임. 1943년 타계.

    • 길선주: 한국 최초의 목사. 3.1 운동 때 서울에 늦게 도착. 총감부에 자수하였으나 무죄로 풀려남.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됐었으나 2009년 건국훈장 수여

    • 김병조: 33인 중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았음. 상해에서 임정 상임이사, 사료편찬위원 등을 역임. 독립혈사 간행. 북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유공자 포상이 안 되다가 1990년 3.1절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김완규: 경술국치 후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조사직을 맡고, 민중 계몽운동 전개. 1949년 타계.

    • 창준: 개신교 측 대표. 함경북도 마세 운동 주도. 광복 후 공산주의 개신교 운동 전개.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1948년경 월북. 독립유공자에서 제외. 북한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한국저쟁대한민국이 북침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등 역사왜곡을 주장하는 활동을 하였다.

    • 나용환: 23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포교 사업. 1936년 병사.

    • 나인협: 19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교사 활동. 1951년 병사.

    • 박동완: 개신교 측으로 3.1 운동 경기 지방의 시위 주도. 신간회 상임이사. 1923년 하와이로 망명. 1941년 병사.

    • 백용성: 불교 대표. 법명은 용성진종대사. 16세 때 출가하여 해인사 스님들의 봉기 주도. 불교 정화 및 대중화에 힘써 서울 시내에 최초로 포교당 세움. 대각사 창건 후 60여종의 불경어록과 저술을 남겼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틈틈이 상해 임시정부를 물심양면 지원했으며,윤봉길을 불자에 귀의시킨 뒤 그를 임시정부로 보내 김구 밑에서 일하게 하기도 했다. 윤봉길 의거 후에는 직접 중국으로 가 장제스와 마오쩌둥에게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하는 등 무장투쟁을 준비하였으나 밀정에게 걸려 실패했으며, 실의 속에 1940년 입적.

    • 박준승: 29세 때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포교 사업. 1927년 병사.

    • 신석구: 개신교 대표. 3.1 운동 후 1938년 신사 참배 거부. 1945년 전승 기원 예배 거부로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9년 감리회 북한 지역 총책임자로 개신교 민주당 결성. 같은 해 진남포 4.19 사건으로 북한 당국에 검거되어 1950년에 처형.

    • 신홍식: 개신교 대표. 평양 남산현 교회 목사로 있다 3.1 운동 참가.신사 참배 거부. 1939년 사망.

    • 양전백: 평양 신학교 졸업. 목사로 있다 3.1 운동 참여. 목회 사업에 전념. 105인 사건에 연루.

    • 양한묵: 1898년 일본에서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입문. 1905년 헌정동지회를 만들고 구국운동. 1919년 10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순국.

    • 오세창: 개화론자 오경석의 아들이자 천도교 신자. 한성순보 기자. 만세보, 대한민보 등의 사장. 해방후 1953년 사망.

    • 오화영: 감리회 목사. 6.25때 서울에서 납북되어 1962년 병사. 북한의 평양 애국 열사릉에 안치. 1989년 3.1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996년 11월 위패만 국립묘지에 안치.

    • 유여대: 목사로 3.1 운동 당시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다 오후 늦게 서울 도착. 일경에 붙들렸다. 1937년 사망.

    • 이갑성: 개신교 신자.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 3.1 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 신간회 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주도 등에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인물 중 한 사람이었지만, 변절했다는 주장, 이에 더해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2005녀 삼일절 특집 SBS 뉴스추적에서 심층 취재한 결과 1930년대까지는 오히려 요시찰인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매일신문에서 2010년에 이 떡밥에 낚여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언급했다가 정정 기사를 냈다 매일신문은 역사 속의 인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고도 친일파로 매도된 억울한 '희생자'였다고 평했다.그러나 40년대까지 변절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는 상태.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로, 광복을 넘어 5공 시절인 1981년에 서거.

    • 이명룡: 개신교 대표. 105인 사건 연루. 3.1 운동 후 물사 장려 운동 참가, 언론 활동. 1956년 병사.

    • 이종일: 천도교 대표. 보성사 인쇄소 사장으로 선언서 인쇄. 1925년 작고.

    • 이종훈: 천도교 대표. 1931년 만주에서 병사.

    • 이필주: YMCA초대 체육 교사로 일하다 목사가 되었음. 1942년 작고.

    • 임예환: 동학혁명에 동참, 3.1 운동에 가담.

    • 최성모: 감리회 목사. 이필주를 만나 3.1 운동에 가담.황해도 시위 주도.

    • 홍기조: 홍경래의 직계후손. 22세 때 천도교 입문, 손병희와 평안도 천도교 독립운동 주도. 3.1 운동 후 평안도 용강에서 독립운동. 1938년 병사.

    • 홍병기: 천도교 대표. 고려혁명위원회 조직.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신의주에서 체포. 1949년 작고.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는 손병희와 권동진 등 15명 기독교는 이승훈과 길선주 등 16명 불교는 한용운과 백용성 2명이었습니다.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33명입니다.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말한다. 종교별로는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씩 참가했다. 이들 중에 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되지 않은 김병조와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은 길선주, 그리고 체포 직후 구금 중에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 가운데는 손병희처럼 복역 중 병을 얻어 곧 사망한 이들도 있었다.


    기독교인

    이승훈(李昇薰),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오화영(吳華英),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박동완(朴東完), 신홍식(申洪植),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천도교인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임예환(林禮煥), 나인협(羅仁協), 홍기조(洪基兆), 박준승(朴準承), 양한묵(梁漢默), 권병덕(權秉悳), 김완규(金完圭), 나용환(羅龍煥),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종일·최린(崔麟)


    불교인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