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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한 쇠똥구리
고혹한 쇠똥구리23.09.04

서당은 언제 처음 생겼는지 알고 싶어요

서당이 최초로 생긴 시기는 언제인가요? 어떤 계기로 서당이네 생기게 되었나요? 그리고 서당에서 교육을 할 때 어떤 내용을 교육시켰는지 그 내용도 알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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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05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당의 기원이 궁금한가봅니다.

    서당교육의 역사적 기원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정설이 없습니다. 논자에 따라서는 고구려시대의 경당(扃堂)과 같은 학교제도를 서당교육의 출발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을 세워 관학교육의 출발로 삼는 한편, 민간교육기관으로서 경당을 두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사료인 ≪신당서 ≫와 ≪구당서 ≫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책을 사랑하여 벼슬아치 집에서 평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저자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혼인하기 전의 자제들이 여기에서 밤낮으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라고 하였습니다.

    서당교육의 내용은 강독·제술·습자의 세 가지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당은 한국 사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삼국시대 고구려에 경당(扃堂)이라는 부락단위의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것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초기부터 각처에서 성행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서당에서는 천자문을 배우는 초학에서부터 경서를 배우는 자까지 다양했으며 맨 처음 대하는 책은 천자문이나 유합이었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단자에 대한 음훈의 의식을 깨우치고, 이 단자를 붙여 음독하는 법을 배운 다음 계몽편이나 동몽선습 또는 격몽요결, 명심보감등을 통하여 초보적인 구두와 문장의 뜻을 해독하는 훈련을 쌓는 한편 책 속의 교훈적인 내용을 터득하게 됩니다. 다음은 십팔사략, 통감, 소학등을 배워 문리가 트이고 견식이 열리면 사서오경을 배우게 되었다고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당의 기원은 고구려의 경당에서 찾아볼수있으며 송나라 사람이었던 서긍의 고려도경에서도 서당의 존재가 언급되며 조선시대에는 여러 형태의 서당이 세워졌습니다.

    주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서당의 주인이자 선생인 훈장이 이들을 가르치며, 교육은 강독과 제술, 습자로 이루어졌으며 오전에 강독, 오후에 습자, 야간에 제술을 학습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당은 고려 시대, 심국 시대에도 존재 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서당은 조선 시대에 걸쳐서 계속된 비 형식적 사설 교육 기관 입니다. 설립에 있어서 인가(認可)를 위한 기본 재산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뜻있는 자는 자유로이 설립·폐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서당은 사학(四學)과 향교에 입학을 위한 준비 및 널리 서민 대중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 기관이 되어 한때 극히 성행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있었다고 하는데 보통 천자문을 기본 으로 해서 소학을 수업 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당의 기원은 고구려의 경당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송나라 사람이었던 서긍의 고려도경에서도 서당의 존재가 언급되며 조선시대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서당이 세워졌고 일제치하에서도 여전히 서당은 존재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자연스럽게 소학교가 서당을 대체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서당에 대해 탄압하지 않았습니다.

    주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서당의 주인이자 선생인 훈장이 이들을 가르칩니다. 무학년제로 운영되었다. 입학은 대체로 동지에 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12월 학기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교육은 강독과 제술, 습자로 이루어졌다. 보통 오전에는 강독, 오후에는 습자, 야간에는 제술을 학습했습니다.

    강독의 경우 기본적으로 천자문을 시작으로 유합, 동몽선습, 사자소학, 추구 등까지 기초교육이 이루어지고 그 다음으로 통감절요로 들어가서 한문 문리를 터득하게 되고 그 외에 명심보감, 채근담, 삼강오륜, 근사록, 소학 등도 기본 교양으로 가르칩니다

    제술의 경우 오언절구, 칠언절구, 사율, 고풍, 십팔구시, 작문으로 이루어졌으며 주로 서당의 고학년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제술은 문학적 소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훈장의 자질에 따라 제술이 제외되기도 했습니다.

    습자의 경우 붓으로 글씨를 쓰는 교과인데 글씨를 반듯하게 쓰는 해서를 주로 쓰며 단계적으로 행서와 초서로 나아갔습니다. 어릴수록 아무래도 소근육 발달이 더딜 수밖에 없다보니, 대다수의 학동은 강독보다 습자를 더 부담스러워했다고 합니다.

    그럼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과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당교육의 역사적 기원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정설이 없다. 논자에 따라서는 고구려시대의 경당(扃堂)과 같은 학교제도를 서당교육의 출발로 이해하기도 한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워 관학교육(官學敎育)의 출발로 삼는 한편, 민간교육기관으로서 경당을 두었다.


    중국의 사료(史料)인 ≪신당서 新唐書≫와 ≪구당서 舊唐書≫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책을 사랑하여 벼슬아치 집에서 평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저자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혼인하기 전의 자제들이 여기에서 밤낮으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경당에서는 문무겸비의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이는 신라의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교육기관인 동시에 청소년들의 결사조직체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지닌 맹점은 경당의 사회적인 역할이 과연 어느 정도로 서당의 사회적 역할과 일치하였는가를 명확히 해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앞으로 경당에 대한 정밀한 성격규명이 있은 다음이라야 서당과의 상호 동질성과 이질성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신라에서도 설총(薛聰)이 경서(經書)를 이두로 풀어서 제생(諸生:여러 학생)을 가르쳤다고 하였으니, 그가 가르친 곳이 사숙일 가능성이 짙고, 이 또한 서당교육의 연원의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라는 서당 형태의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에는, “여염집들이 있는 거리에는 경관과 서사들이 두셋씩 마주 바라보이고, 이곳에 백성의 자제들이 무리로 모여 스승에게 책[經]을 배우며, 조금 장성하게 되면 뜻이 맞는 사람끼리 벗을 택하여 절간으로 가서 글을 익힌다.


    그리고 아래로는 코흘리개 어린이까지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은 고려시대도 이미 조선시대의 서당제도와 같은 민간교육기관이 존재하였음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서당의 교수방법은 강(講)이 주된 것이었다. ‘강’이란 이미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그 뜻을 질의응답하는 전통적인 교수방법이다.


    강은 대개 순강(旬講)·망강(望講)·월강(月講) 등으로 나누어지지만, 서당에서는 일강(日講)이 위주였다. 강에는 배강(背講)과 면강(面講)이 있다. 배강은 암송낭독이고 면강은 교재를 보면서 읽는 임문강독(臨文講讀)이다.


    강을 하고 난 뒤에 전개되는 질의응답은 기계적인 기억에 빠지기 쉬운 함정으로부터 건져주었으며, 또 1 대 1의 대면(對面)학습이기 때문에 능력별 수업이 가능하였고, 교사와의 인격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강을 하는 데는 일정한 절차가 있어서 이를 강의(講儀)라고 하였다. 서당교육에서도 곳에 따라서는 서원의 강의와 같이 백록동규(白鹿洞規)나 향약을 낭독하기도 하고, 사석(師席)에 대한 엄숙한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당에서는 진퇴에 있어서 정중한 배례와 동접간의 읍례(揖禮:읍을 하는 예의) 정도였던 것 같다. 강은 날마다 학동의 실력에 맞게 범위를 정하여 배우고, 그날의 학습량은 숙독하여 서산(書算)을 놓고 읽은 횟수를 센다. 보통 1회의 독서량은 100독(百讀)이었다.


    1일의 독서량을 그 이튿날 배송(背誦)하며 합격한 다음에 새로운 학습으로 나아갔다. 이는 학동의 능력에 따라 서로 달랐으므로 일종의 완전학습의 형태와 같은 것이다.


    만일 배송을 하지 못하는 경우 그의 학업성취도가 달성될 때까지 반복시켜 완전히 이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따라서 개인의 능력에 따라 학습진도가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또한 야독(夜讀)을 장려하여 자정이 넘도록 등불 아래서 글을 읽는 소리가 마을에 퍼졌다.


    학습교재의 순서는 대개 ≪천자문≫·≪유합 類合≫ 같은 책으로 기초 한문자를 가르치고, 다음에 ≪동몽선습≫ 등으로 글자를 붙여서 소리내어 읽는 방법을 가르쳤다.


    글의 뜻[文理]을 깨치는 방법으로는 먼저 구두(句讀)의 문리에서 출발하여 일장(一章)의 문의(文義)로 나아가는 점진적 방법으로 가르쳤으며, 마침내 스승 없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지경으로 이끌도록 하였다.


    원래 옛 교육에서의 글공부란, 먼저 글의 뜻을 명백히 하고 응용에 통달할 것이며, 한갓 장구(章句)에 얽매여 문의를 견제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서당교육의 문자학습은 대체로 구두의 문리를 통달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어서 ‘일장의 문의’를 말할 수준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서당교육에서는 계절학습에 관한 것이 특색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즉 계절과 학습의 내용 및 방법을 조화시켰던 것이다.


    예컨대, 겨울에는 경사(經史)와 같은 어려운 학과를 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율(詩律)과 같은 흥미본위의 학습을 시행하였으며, 봄·가을에는 사기나 고문과 같은 글을 읽게 하여 선비로서의 뜻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