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영이라는게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과거 역사에 있었던 '장용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장용영이 만들어진 시기는 언제이며 어느왕 시기였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후기 1793년(정조 17)에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군영(軍營).
정조는 새로운 금위체제를 위해 1785년에 장용위(壯勇衛)라는 국왕 호위의 전담부대를 창설하였습니다. 장용위의 총책은 장용영병방(壯勇營兵房)이라 했고, 그 아래에 무과 출신의 정예 금군을 두어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체제로 만들었습니다.
그 뒤 1793년에 그 규모를 더욱 확대시켜 하나의 군영으로 발전시키니, 이것이 곧 장용영이다. 장용영은 크게 내영과 외영으로 나누어졌다.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내영은 1월에 수원을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장용외사(壯勇外使)의 직을 겸하도록 함에 따라 자연히 도성의 본영을 내영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내영의 지휘관인 장용영병방은 장용사(壯勇使) 또는 장용영 대장으로 개칭되었다. 그 규모는 종래의 마보군(馬步軍) 3초(哨)에서 5사(司) 25초로 확대되어 도제조아문이 되었다. 그 아래에 군색(軍色)·향색제조(餉色提調) 각 1인, 장용사 1인, 종사관 1인, 선기별장(善騎別將) 2인, 행파총(行把摠) 5인, 선기장(善騎將) 3인, 초관(哨官) 25인을 두었다. 5사는 전·후·좌·우·중사로 도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 일대를 포함하였다.
외영제는 수원부를 화성으로 개칭하고 정3품의 부사에서 정2품의 유수로 승격, 장용외사와 행궁정리부(行宮整理府)의 직을 겸하게 했으며 그 아래에 판관 1인을 두었습니다. 이는 곧 정조가 자신의 생부인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현륭원(顯隆園)을 중시해 취했던 것입니다.
외영의 편제는 행궁을 교대로 방비하는 입방군(入防軍) 20초와, 유사시에 동원해 성내의 군사를 돕도록 하는 인근 고을의 협수군(恊守軍) 22초로 구성되었습니다.
입방군은 비교적 정예군사로서 1년에 10초씩 5번(番)으로 나누어 1번에 2초씩 입방하게 하였다. 이에 비해 협수군은 유병장(遊兵將)인 과천현감을 중심으로 유사시에 동·서·남·북성을 각각 분담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입방군·협수군 외에 화성 별개의 수성군(守城軍)이 구성되어 있었다. 외영의 편제는 다시 1798년에 크게 개혁되어 오위법(五衛法)으로 변했습니다.
이는 장악위(長樂衛) 아래에 오위를 두고 각 위를 중심으로 한 정병과 각 대를 중심으로 한 성정(城丁)으로 편성했던 것이다. 정군은 병조의 상번기병(上番騎兵)이, 성정군은 인근 각 읍의 납포군(納布軍)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장용영은 그 설치 목적이 왕권 강화에 있었기에 편제도 중앙집권적인 오위체제를 도입, 강력한 왕권의 상징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자 1802년(순조 2)에 혁파되고 말았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용영 [壯勇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 1793년 정조 17에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군영입니다.
정조는 새로운 금위체제를 위해 1785년 장용위라는 국왕 호위의 전담부대를 창설, 장용위의 총책은 장용영병방이라 했고 그 아래 무과 출신의 정예 금군을 두어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체제로 만들었습니다.
장용영은 내영과 외영으로 나위며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하며 내영은 1월에 수원을 유수로 승격시켜 장용외사의 직을 겸하도록 함에 따라 자연히 도성의 본영을 내영이라 불렀습니다.
외영은 행궁을 교대로 방비하는 입방군 20초, 유사시 동원해 성내의 군사를 돕도록 하는 인근 고을의 협수군 22초로 구성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장용영의 특징
정조의 개혁에는 2개의 칼이 있었습니다. 문(文)으로는 규장각이 무(武)로는 장용영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장용영은 무로서의 규장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병자 호란이 끝난 후 조선은 국방력 강화에 박차를 가합니다. 영조때에 조선후기 대표적 중앙군영인 5군영(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수어청, 총융청)등이 갖추어집니다. 문제는 서인이 정권을 계속 잡으면서, 이들 5군영 마저 서인의 입김에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임금 말 보다, 서인들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이죠.
오죽하면 사도세자를 뒤주에 굶겨죽일때 감시했던 자가 정조시대에 병조판서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거기다가 계속된 정조의 암살 시도는 5군영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합니다.
그래서 정조는 이것을 빌미로 1782년 서른명의 훈련도감에 소속된 무예별감중에서 무과에 급제하고 장교를 역임한 정예무사를 선별해서, 숙위군을 두어 자신을 호위하게 합니다. 1785년 정조9년 7월 20명을 더 뽑아서 총 50명 장용위라고 명합니다.
즉 장용위는 처음부터 전투 부대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국왕을 호위하는 금군으로 출범합니다. 삼총사에서 나오는 총사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지휘권도 병조에 속한것이 아니라, 국왕이 직접 지휘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의 호위총국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장용영은 또 특이하게도 내영과 외영으로 나뉘어 집니다. 내영은 국왕 경호와 궁궐 수비를 위해 궁궐과 도성에 주둔하고 외영은 수원 화성에서 주둔하면서 훈련을 담당하였습니다. 수원 화성의 외영군은 말을 키우는 목장까지 갖추고 있어서, 기마군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조시대에는 함부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이러한 무력적 기능도 있었지만, 무예도보통지와 같은 무예서 발간을 통한 전투기술의 체계화, 화성 수원 축조로 인한 새로운 군사과학 기술의 발전과 실행, 능력 있으면 서얼 이라도 장교로 임용하는 새로운 인사 정책, 화성과 박주등의 장용영 군전을 새로운 농사기법의 시험등 규장각을 통해 정리되고, 만들어진 정책을 미리 시험해 볼수 있는 시험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정조가 죽자 마자 제일 먼저 규장각의 정치,개혁적 기능을 거세하면서 장용영을 해체합니다.
2.장용위의 규모
창설 된지 2년이 지난 1787년, 장용위는 장용청으로 개칭하고 병력 증강합니다.
행정담당 - 병방 1명(병력 및 무기 기타 전투에 관련된 행정 담당), 호방 1명(보급, 군수, 운영자금 담당)
기병-장용위 50명, 회계감관 2명, 군기감관 2명, 통장 2명, 작대장 1명, 소임 10명, 군병 123명 으로 소규모 부대 였습니다.
1788년 1월, 중초와 후초를 만들면서 장용영으로 승격됩니다. 즉 사단급입니다. 창설 3년 만에 다른 5군영과 자웅을 겨룰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기와 장비는 1788년 3월 장조총 500자루, 단조총 300자루, 화차 50대, 환도 300자루, 편곤 177자루, 이화창 기타무기, 화약 530근, 탄환(총알)11만 6000개 였습니다.
훈련은 아주 엄격했는데 " 바람으로 머리 빗고, 비로 목욕하며, 찬 바람 맞고, 더욱 먹으며 훈련한다'고 할 정도 였습니다. 거기다 정조 자신이 직접 창경궁 춘당대에서 훈련시험을 볼 정도였습니다.
당시 정조가 수원 화성에 행차할때도 호위군은 장용영의 군사 들이었고, 수원 화성에서는 장용 외영의 군사들이 합세하여, 국왕의 위엄을 떨쳤습니다. 이에 따라 수원화성은 장용영의 군사들의 가족들도 많이 거주하였습니다. 즉 국왕파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른 군영은 기껏해야 수도에서 주둔하지만,
장용영은 아예 도시 하나를 건설해서 차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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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영 壯勇營 :
조선 정조 17년(1793)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설치한 금위(禁衛) 조직. 내영(內營)과 외영(外營)으로 구성되어 각각 한양 도성과 수원 유수부(留守部)의 숙위(宿衛) 업무를 담당하다가 순조 2년(1802)에 폐지되고 외영만 축소되어 총리영(總理營)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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