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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나
잠이나23.08.29

인조를 구원하려는 병력이 없었나요?

병자호란때 인조는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하러나오는데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를 구원하기위해서 오던 조선내의 병력이 없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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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2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실제로 18만명의 청나라 병력을 맞설만한 힘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원수 김자점은 양평까지 남하해 인조가 항복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북변의 오랑캐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이었던 함경도의 군사와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강원도 근왕군의 패잔병도 합류한 양평의 군세는 17,00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다양한 지역에서 모인 군대였기에 편제가 제각각이었고 새로 도원수로 임명된 심기원의 존재로 인해서 지휘권에 대하여 잡음이 생겨 이러한 일련의 문제들을 수습하느라 김자점은 결국 군사를 움직일 수 없었고 전쟁에서 효과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던 탓에 근왕군은 남한산성 구원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으며, 지휘권이 분산되어 있어서 통일적인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습니다. 사실 대규모의 병력이 집결만 했어도 청군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청나라가 이자성을 칠 때 동원한 병력이 18만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를 견제할 최소한의 병력 외에는 다 끌고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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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금(청)의 병력이 물밀듯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할 겨를도 없어서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고립시켜서 45일간 대립하다가 강화도에 있던 왕실가족을 볼모로 인조의 항복을 요구하였고 인조는 어쩔 수없이 삼전도에 나와 치욕스러운 삼배구고례라는 수모를 당하는 삼전도굴욕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세자와 세자빈 등을 볼모로 보내야 했으며 청과는 군신관계와 더 많은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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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청나라의 대군과 맞서서 몰아낼 무력이 부족했으므로 결국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을 하게 되었고 이게 곧 '삼전도의 굴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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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군은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한 8도의 근왕병이 사방에 몰려들었으나 통합된 지휘와 물자 보충이 이뤄지지 않아 각자 알아서 진격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인조 정권 이래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한 중앙군과 달리 지방군은 훈련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실록에 의하면 지방군은 대체로 평시에 훈련하지않고 농한기에만 형식적으로 한것으로 보이며 지방군이 훈련을 열심히 하면 오히려 의심받기 쉬웠는데 이유는 인조 자신이 지방군격인 황해도의 평산부사 이귀의 병력으로 반정에 성공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

    이에 청군은 손쉽게 각개격파를 노릴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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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조선 내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병력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 경상도병마절도사 김상헌의 군대

    김상헌은 경상도병마절도사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1636년 2월 27일 경상도에서 출진했습니다. 김상헌의 군대는 약 1만 명 규모로, 의병과 관군이 혼합된 부대였습니다. 김상헌은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도중 청군과 수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청군의 우세한 병력과 화력에 밀려 남한산성에 도착하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 충청도병마절도사 이시백의 군대

    이시백은 충청도병마절도사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1636년 3월 11일 충청도에서 출진했습니다. 이시백의 군대는 약 5천 명 규모로, 의병과 관군이 혼합된 부대였습니다. 이시백은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도중 청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청군의 우세한 병력과 화력에 밀려 남한산성에 도착하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 전라도병마절도사 이귀의 군대

    이귀는 전라도병마절도사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1636년 3월 12일 전라도에서 출진했습니다. 이귀의 군대는 약 1만 명 규모로, 의병과 관군이 혼합된 부대였습니다. 이귀는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도중 청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청군의 우세한 병력과 화력에 밀려 남한산성에 도착하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외에도 경기도병마절도사 김경서의 군대, 경상도관찰사 이시발의 군대, 충청도관찰사 이시방의 군대 등이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으나, 모두 청군의 공격에 패배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추천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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