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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매미372
젊은매미37223.04.30

태종이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밀어낸 이유는

태종 다음에 세종은 충녕으로 원래 세자는 양녕이었었는데 태종이 양녕을 세자에서 밀어내고 충녕에게 왕위를 넘겨줬는데 양녕을 세자에서 밀어낸 이유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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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녕은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장자승계의 원칙에 의해 세자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공부에 신경 쓰지 않고 노는 것을 좋아해서 태종의 골치를 썩였지만, 태종은 세자를 함부로 교체할 수 없었던 터라 얼마 동안은 타이르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자가 계속해서 말썽을 부리자, 세자궁을 대궐 가까이에 지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자주 살피라는 우빈객 이래의 말에도, 다 큰 부자지간에 그렇게 간섭하면 반드시 서로의 사이가 나빠진다며 듣지 않았을 정도. 태조가 왕위 서열을 무시하고, 형제 중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의 피를 보고 권좌에 오른 이였던 만큼, 태종으로서는 장자인 양녕에게 피를 보지 않고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양녕은 이오방, 구종수와 궐을 나가 논 것을 비롯하여, 전 중추부사 곽선의 첩, 어리를 납치해 궐로 데려온 큰 사건 이전에도 숱하게 말썽을 부리고 공부를 게을리 해, 태종과 원경왕후의 속을 시꺼멓게 태웠다. 실록에 보면, 태종이 지신사(知申事) 조말생을 은밀히 불러 세자가 공부를 않고 놀기만 좋아하며 황음(荒淫: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하는 것이 심하니 어쩌면 좋으냐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한탄을 했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이다.[7]


    태종이 양녕이 저지른 사고들을 마무리 짓고자, 그와 어울리던 패거리를 벌주고, 그 중 몇은 파직시키자 양녕이 곡기를 끊은 적이 있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원경왕후가, 너는 어리지도 않은데 지금 어째서 부왕(父王)께 이와 같이 노여움을 끼치느냐? 이제부터는 조심하여 효도를 드리고 또 밥을 들도록 하라[8]며 꾸지람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상술(上述)했다시피, 양녕은 어리라는 여인과 나누던 밀회가 발각되어 태종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고, 장인인 김한로가 태종으로부터 문책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를 장인의 집에 숨겨두고[9] 아이까지 갖게 한 일(…)이 드러나 태종이 대노하여 질책하자, 양녕은 "아바마마도 첩 많으면서 왜 내가 축첩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까?" 라며 반박하는 내용의 수서(手書)를 올려 태종을 당황케 한 일도 있다. 태종은 답답했는지,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에게 수서를 보여주며, "얘를 어쩌면 좋냐"며 한탄했다. 그 외에도 양녕은 기생들과 놀고, 매사냥을 즐기며, 꾀병을 부려 서연(書筵)[10]을 피하는 등 온갖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렸다.


    '세자양보설'과 반대로, 충녕대군이 인격과 학문 양쪽 모두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이자, 세자 자리에 있었음에도 아우에게 경계심을 가졌던 듯하다. 여러 대군들과 함께 부마 이백강의 연회에 가서 기생과 놀다가,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사 여기까지만 봐도, 양녕대군의 행적만 보면 그간 태종이 화병이 안 생긴 것이 신기한 걸 넘어 이상할 따름이다. 양녕대군이 이 분의 아들이었다면, 폐세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됐어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