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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한 쇠똥구리
고혹한 쇠똥구리22.12.02

후삼국시대 태조왕건과 궁예 궁금합니다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있는 장군이고 엄청난 총애를 받음으로서 의형제를 맺었다는건 알고있습니다.

근데 모종의 이유로 왕건이 군사를 일으켜 궁예를 폐위 시키고 자신이 왕위를 이어받았다는데 일방적인 쿠데타라고 봐도 되는건가요?

둘 사이가 어떤 이유때문에 갈등이 생긴건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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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궁예는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신병에 가까운 폭정을 보여주며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에 왕건은 궁예를 폐위시키고 고려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왕건과 궁예의 갈등의 배경에는 궁예의 지나치게 억압적이었던 전제 왕권에 불만을 품은 정치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폭압적인 전제 군주로서 군림하자 궁예 정권하에서 성장하였던 직업 군인 세력, 옛 고구려계의 패서 지역 출신들인 호족 세력, 신진 유학자 세력 등이 불만을 품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시중의 자리에 있었던 왕건을 대안적인 인물로 강력히 지지하여 결국에는 궁예를 축출하기에 이릅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테스티아입니다.

    * 사실상 왕건 자신의 굳은 의지로 인한 쿠데타라기 보다는 궁예가 신하들의 총애를 잃은 상황에서 왕건이 오히려 왕이 되었을 때 자기(신하)들에게 유리한 부분이 있겠다고 생각되어 종용된 쿠데타였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왕건과 궁예 사이에 막 큰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아무래도 왕건도 궁예의 포악함에 다른 신하들처럼 자신도 죽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은 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안녕하세요.

    왕건은 궁예 휘하의 장군이 되어 많은 공로를 세웠다고 합니다.

    특히 가문이 키워온 수군을 이끌고 한강 유역과 지금의 경상남도까지 공략하여 기세를 떨쳤고 이런 왕건의 활약에 힘입어 궁예는 견훤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본래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했던 궁예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접고 스스로를 신라 왕실의 후예라 하면서, 자신이야말로 타락한 신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창시할 구세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력이 커진 호족과 장수들을 반역죄로 처형했는데 왕건도 죽을 뻔했다고 하네요.

    가까스로 위기는 모면했지만 언제 궁예의 손에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궁예가 독재로 민심을 잃게 되자 왕건는 자신의 세를 규합하여 918년에 궁예를 내쫓고 스스로 고려의 주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 답변이 질문자님께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