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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11.14

대구 10.1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대구 10.1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지역 명이 붙은 것으로 보아 대구에서 벌어진것 같은데

어떤 배경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결과와 영향을 알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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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 지역에서 발발한 민중봉기. 영남 지역 한 가운데 위치한 대구의 지리적 특성상 인근 지역으로 파급력이 어마어마해 사실상 전국으로 번졌다.


    미군정의 행정 실패로 쌀값이 폭등하여 식량난과 전염병(콜레라)이 겹치자 당시 미군정은 쌀 강제 수집과 제한 배급 정책을 펼쳤고 대구에서는 굶주린 시민들의 시위가 수시로 벌어졌다. 5월 말부터는 쌀 배급과 인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벌어졌고 9월에는 부산에서 25만 명이 총파업[1]에 참가했으며, 급기야 10월 1일 저녁 대구역 앞에서 수천 명의 시위 노동자와 100명의 무장 경찰들이 대치하다가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다음 날 분노한 시민들은 숨진 노동자의 시신을 메고 대구 경찰서를 점거해 무기를 탈취했고, 대구역 앞에서 경찰과 시민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시위대는 부잣집 혹은 친일파의 집을 털어 식량과 생필품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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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해방 후 미군이 군정을 할 당시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미군정의 행정 실패로 쌀값이 폭등하여 식량난과 전염병이 겹치자 당시 미군정은 쌀 강제 수집과 제한 배급 정책을 펼쳤고 대구에서는 굶주린 시민들의 시위가 수시로 벌어졌다고 합니다. 미군의 군정에 항의하던 시민들을 향해 경찰이 총격을 가한 것이 직접적인 발단이 되어 일어났는데 10월 1일 오전에 파업을 벌이고 있던 500여 명의 노동자들은 대구역과 대구공회당 인근에서 100여 명의 경찰과 대치하며 시위를 벌였고, 부녀자와 어린이 등을 중심으로 한 시민 1천여 명은 대구부청 앞에서 식량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며 시위를 한 것 입니다. 좋게 해석하든 나쁘게 해석하든 커다란 사건인 것은 맞지만 인지도도 낮고 언급도 잘 되지 않는 편인데 이 사건은 대하 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표방한 제 1공화국에 의해 철저히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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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1.1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구 10.1 사건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1946년 10월 1일, 대구 지역에서 발발한 민중봉기. 영남 지역 한 가운데 위치한 대구의 지리적 특성상 인근 지역으로 파급력이 어마어마해 사실상 전국으로 번졌다고 합니다.
    미군정의 행정 실패로 쌀값이 폭등하여 식량난과 전염병(콜레라)이 겹치자 당시 미군정은 쌀 강제 수집과 제한 배급 정책을 펼쳤고 대구에서는 굶주린 시민들의 시위가 수시로 벌어졌습니다. 5월 말부터는 쌀 배급과 인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벌어졌고 9월에는 부산에서 25만 명이 총파업에 참가했으며, 급기야 10월 1일 저녁 대구역 앞에서 수천 명의 시위 노동자와 100명의 무장 경찰들이 대치하다가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다음 날 분노한 시민들은 숨진 노동자의 시신을 메고 대구 경찰서를 점거해 무기를 탈취했고, 대구역 앞에서 경찰과 시민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시위대는 부잣집 혹은 친일파의 집을 털어 식량과 생필품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미군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와 기관총 부대를 앞세운 병력을 동원하여 진압했지만, 시위는 영창과 인근 지역으로 번져 12월 중순까지 전국 73개 시군으로 확산되었다. 대구/경북 일대에서만 전체 인구의 1/4인 77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전국적으로는 230만 명이 참여하였습니다.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경북에서만 경찰과 시위대 양쪽에서 170명이 숨지고 18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지만 보복이 두려워서 신고를 꺼리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희생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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