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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안경곰70
아리따운안경곰7023.11.26

거란 2차침입때 활약한 양규 장군에 대해 궁금합니다

거란 2차 침입때 양규장군은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강감찬 장군보다

알려지진 않은 인물인데

고려의 양규 장군은 어떤 업적들이 있나요?


요즘 양규장군이 재평가되고 있는데

양규장군은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이었는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업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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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전기 형부낭중, 도순검사, 공부상서 등을 역임한 무신입니다.

    목종 때 형부낭중이 되며 1010년 거란의 성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흥화진을 포위하자 도순검사가 되어 진사 정성 과 부사 이수화, 판관 장호 등과 더불어 성을 지키며 저항, 항복 권유를 물리쳤습니다.

    이에 거란군은 포위를 풀고 통주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 부대를 격파 후 남진, 거란군은 이때 사로잡은 노전을 흥화진에 보내 항복을 권했으나 오히려 노전을 사로잡고 성을 지켰습니다.

    그 뒤 군사 700여 명을 거느리고 흥화진을 출발해 통주에서 강조의 부하였던 병사 1000여명을 수습해 곽주에 머무르고 있던 거란병 6000여 명을 공격, 성을 탈환하고 성 안에 있던 남녀 7000여 명을 통주로 옮겼습니다.

    1011년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란 가나 거란군의 철병교섭이 성공해 거란군이 물러갔고, 이에 양규는 구주방면으로 돌아가는 거란군을 지키고 있다가 무로대에서 2000여 명을 베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2000여 명을 탈환, 석령에 이르러 다시 2500여 명을 베고 포로가 된 1000여 명을 탈환했습니다.

    여리참에서 싸워 1000여 명을 베고 포로가 된 1000여 명을 탈환, 다시 거란의 선봉과 애전에서 싸워 1000여 명을 베었으며 이때 거란의 군사가 갑자기 몰려와 구주별장 김숙흥과 더불어 싸웠으나 남은 군사가 얼마 되지 않고 화살이 떨어져 진중에서 전사, 양규는 고군으로 한달 사이 7차례 싸워 적을 6500명 베고 포로가 된 백성 3만여명을 구했으며 낙타, 말, 병장기 등 노획물을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규장군은 고려 시대의 무신으로 거란의 성종 군사에게 홍화진이 포위되자 완강하게 저항하다 무로대 이수 석령 여리침 등에서 기습하여 7전 7승하여 7000여명의 거란군을 사살하고 잡혀가던 1만 여명의 백성들을 구하였습니다. 이어 예전에서 적을 기습하여 1000여명을 베었으나 대군의 공격을 받아 김숙홍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규는 거란의 2차 칩입(1010, 현종 원년) 흥화진을 지키고 거란이 수차례 항복을 권유했으나 거부하고 항전했습니다. 1011년 거란군이 철수하게 되자 귀주 방면에서 돌아가는 거란군을 급습하여 거란군 2,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2,000여명을 구출했으며, 석령에 이르러 다시 거란군 2,500명을 베고 포로 1,000명을 구출합니다. 이후에도 신출귀몰하게 7차례나 거란군을 기습해 거란군을 격퇴하고 3만명의 백성을 구출하였습니다. 당시 고려 인구 300만명 정도로 잡으면 1%의 국민을 구해낸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 물자가 다 떨어져 항전하다가 전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