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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한셰퍼드125
모던한셰퍼드12523.04.11

바티칸 교황청 경비는 스위스 근위대만 맡고있는걸까요?

바티칸 교황청은 계속적으로 스위스 출신들만 교황청경비를 하고있는데 이러한이유는 역사적으로 어떠한 전통에 따라 스위스근위대만 교황청경비를 하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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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27년 로마 약탈 당시 147명의 스위스 근위병이 로마 제국 군대에 저항하며 장렬히 전사했고

    그 후 이들의 용맹함을 기리기 위해 로마의 교황청 수비를 스위스 용병이 담당하는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한마디로 신의를 신의로 지키는 것입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1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교황 식스토 4세(재임기간1471-1484)가 스위스 연방과 동맹을 체결한 것이 시발점이라고합니다. 그 이후로 이탈리아 반도내에 여러 세력과 대립하면서 스위스 용병들이 최전선에 나가 용맹하게 싸우며 그 명성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특히 1527년 5월6일, 신성로마제국의 카를5세가 이끈 군대에 의해 로마 약탈이 벌어지던 당시 교황 클레멘스7세가 비밀통로를 통해 바티칸을 빠져나가 피신하는 동안 189명의 근위병 가운데 근위대장을 비롯한 147명은 로마제국 군대에 저항해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40여명의 근위병이 교황 곁을 끝까지 호위해 충성심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로마의 교황청 수비를 스위스 용병이 맡게 되는 전통이 생겨났다고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는 소위 사코 디 로마 전투가 벌어지는데 당시 교황령은 수많은 동맹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지원군이 오지 않거나 도망쳤고, 스위스 근위대 500명과 오합지졸 시민군 4500여명만이 로마의 성벽을 지켰습니다.

    이에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는 스위스 근위대에게 조국으로 돌아갈것을 권고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남겠다는 맹세를 지켜야 한다며 교황의 권고를 거부합니다.

    5월6일 성벽이 뚫리고 근위대는 189명만 남았지만 이들은 도시를 약탈하며 끝없이 밀려오는 신성로마제국 용병대에 맞서 스위스 근위병의 저항이라는 이름이 붙은 마지막 전투를 치루게 됩니다.

    교황이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싸워 근위병 189명 중 147명이 전사했습니다.

    이에 감복한 교황청은 이들을 무한히 신뢰하게 되어 교황 바오로 3세 이후 교황청은 오직 스위스 근위대만 고용하도록 못박았고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르렀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바티칸 시국으로도 알려진 바티칸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본부이며 이탈리아 로마 내에 있는 독립 도시 국가입니다. 바티칸은 주로 바티칸의 보안 및 의식 임무를 담당하는 소규모 스위스 군인인 스위스 근위대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티칸의 보안에는 바티칸 경찰과 이탈리아 경찰과 같은 다른 조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