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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르름
푸르르름23.06.28

조선은 묘호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원래는 ㅇ조 ㅇ종 그러한 묘호는 황제국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 하는데


조선은 개국 군주 이성계부터 순종까지 묘호를 사용했었는데 이러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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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이 동양에서는 가장 선진국이었기 때문에 중국과의 교류는 필수적이었습니다. 외왕내제로 중국과 교류할때는 호칭을 제후국의 왕을 사용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묘호나 무덤, 호칭 등을 미약하게나마 천자국의 용어를 사용했다고합니다. 조선은 다른 것들은 모두 제후국의 예법에 맞추면서도 묘호제만은 지켰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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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재위했던 27대의 왕은

    저마다 고유의 왕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묘호(廟號) 혹은 종호(宗號)라고

    지칭되는 왕명은 엄격히 말하면

    일종의 시호(諡號)입니다.

    묘호라는 명칭은 말 그대로 사당의 이름이며, 묘(廟) 자 앞에 시자(諡字) 한 글자를 붙인 태묘(太廟)니 중묘(中廟)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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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시호가 죽은 자의 일생을 평가하고 그에 적합한 이름을 붙여 생전의 업을 심판하는 것이었다면, 묘호도 살아생전의 업적을 평가하여 그에 걸맞은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시호와 묘호는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다만 시호는 한 인간으로서 왕이나 왕비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를 종합적으로 보여 주는 데 비하여 묘호는 왕이 왕으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였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달랐다. 그래서 묘호는 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후세의 사람들이 내리는 일종의 업무 평가서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묘호는 오직 왕만이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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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묘호는 군주의 치세를 나타내는 글자인 시자와 종호를 말하는데, 왕의 재임 시 업적에 대한 후세의 평가였다고 합니다.

    다만 묘호가 황제에게만 붙인 칭호는 아니고 동아시아 문화권의 왕조국가에서 황제 또는 국왕과 같은 군주에게만 붙인 칭호로 군주가 승하한 뒤 태묘(太廟, 또는 종묘)에서 군주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었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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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묘호가 있다는 것은 후대가 제사를 받듦으로써 선대(先代)로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 연산군(燕山君)이나 광해군(光海君)은 실제 왕위에 올라 정치를 하였지만 묘호가 없기 때문에 선대로 인정되지 않는다. 묘호는 왕이 승하하면 왕위를 계승한 국왕과 대신들이 논의하고, 이후 대신들이 삼망(三望)을 올리면 새 국왕이 그중 하나를 낙점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최종 결정권자인 새 국왕은 묘호에 대한 직·간접적인 이해 당사자이므로 묘호의 의미가 좌우될 수 있었다.


    묘호는 두 글자로 만들어진다. 앞의 한 글자는 시자(諡字)로서, 시법에 따라 정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뒤의 한 글자는 종가의 계통과 조공 종덕의 예제(禮制)에 근거하여 조나 종을 붙인다. 우선, 시자는 생전의 행적을 꼼꼼하게 따져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국왕이 생전에 선호하던 글자로 결정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예종(睿宗)은 일찍이 손수 예종이란 두 글자를 책등에다 쓰고 “죽어서 이 시호를 얻으면 만족하겠다.”고 하였다. 명종도 “시호를 명(明)으로 얻으면 좋겠다.”고 하였으며, 영조는 당시 경연을 담당한 신하에게 “나로 하여금 영(英)자를 얻어 묘호를 삼게 하면 만족하겠다.”고 하였다.


    조종(祖宗)의 추증은 종계(宗系)와 조공 종덕의 원리를 적용하되, 반드시 일정한 원칙이 있거나 조가 종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었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경우 건국을 하였을 경우, 그리고 나라를 중흥시킨 경우, 그리고 전쟁의 위기에서 구하였을 경우 조(祖)를 추증하였다. 이에 반해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하였을 경우 종(宗)을 추증하였다. 신라 시대의 경우 무열왕이 태종이라는 묘호를 가졌고, 고려 시대의 경우 태조 왕건만이 조의 묘호를 가졌으며, 나머지 왕은 종을 추증하여 철저히 조종법을 지켰다. 이에 비해 조선 시대의 경우 27명의 왕 중 태조 이성계를 포함하여 7명이 조(祖)의 묘호를 가졌다. 즉, 단종을 쫓아냈지만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했다고 평가되는 세조(世祖),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宣祖), 반정(反正)과 호란(胡亂)을 겪은 인조(仁祖),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그리고 홍경래의 난을 치른 순조(純祖) 등이 있다. 반면 중종(中宗)은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지만 성종(成宗)의 직계를 우선시하여 중종으로 결정되었다.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에는 조선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하여 문종의 현릉(顯陵), 선조의 목릉(穆陵),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현종의 숭릉(崇陵),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혜릉(惠陵), 영조의 원릉(元陵), 익종의 수릉(綏陵), 헌종의 경릉(景陵) 등 9릉 17위가 모셔져 있다. 이 중 처음의 묘호가 개정된 경우는 선조와 영조이다. 선조의 처음 묘호는 선종(宣宗)이었다. 광해군은 즉위하던 해부터 부친인 선종의 묘호를 개정하고자 하였고, 마침내 1616년(광해군 8) 선조(宣祖)로 바꾸었다. 이는 1608년 치러진 선조의 국장과 관련된 문서인 『선조 국장도감일이방의궤(宣祖國葬都監一二房儀軌)』의 원래 제목이었던 ‘선종 소경 대왕 국장도감일방의궤(宣宗昭敬大王國葬都監一房儀軌)’, ‘선종 소경 대왕 국장도감이방의궤(宣宗昭敬大王國葬都監二房儀軌)’라는 표지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조의 경우도 영종(英宗)이었던 것을 1889년(고종 26) 12월에 개정하였다. 『영조 묘호도감의궤(英祖廟號都監儀軌)』는 조선 21대 국왕인 영종의 묘호를 영조로, 시호를 '정문 선무 희경 현효(正文宣武熙敬顯孝)'로 개상하고 존호를 '중화 융도 숙장 창훈(中和隆道肅莊彰勳)'으로 추상하며 정성 왕후(貞聖王后)에게 원렬(元烈), 정순 왕후(貞純王后)에게 정현(正顯)이라는 존호를 추가로 올리는 것으로, 1889년 12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의 과정과 절차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묘호를 바꾸는 것은 은연중에 종보다는 조가 격이 높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1857년(철종 8) 순종에서 순조로, 고종 때 정종에서 정조(正祖)로 개정한 것은 왕권의 정통성을 부각시켜 왕권을 강화하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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