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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르름
푸르르름23.08.28

고려의 후기 왕들이 충자 돌림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충선왕 충렬왕 등 충ㅇㅇ 왕으로 왕호가 계속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앞에 충자를 븥이게 된 이유가 있었을까요?


왜 충자 돌림을 왕호로 사용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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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이는 곧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의 '충~'이라 할 수 있으며, 그래서 공민왕 때 이 '충~'의 왕호를 던져 버리고 고려식으로 왕호를 다시 회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충 자가 들어가는 왕들의 시대는 원나라가 간섭하던 시기 입니다.

    당시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이름에 충 자를 넣게 되었습니다.

    원은 부마국으로 고려의 왕실 호칭과 정치 제도를 낮추며, 원나라 황제에게 충성한다는 의미로 임금의 묘호에 쓰지 않는 충 자를 붙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몽골과에 전쟁에서 진 고려는 몽골의 간섭을 받게되었고 이름을 원나라로 고친 몽골은 고려의 왕자들을 원나라로 끌고 가서 원나라 공주와 강제로 결혼해서 사위를 삼았습니다. 왕의 이름도 원나라에 충성하라는 의미로 충자를 넣게하여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으로 지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후기 왕들 중 충자 돌림을 시호로 사용한 왕들은 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 6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전부 다 원나라의 공주들과 결혼을 해서 나은 이들이기에 원나라 혈통 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들의 재위 기간을 합치면 1274년 부터 1351년 까지 77년 이나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말기에 왕의 이름에 충자가 들어가는 이후는 몽고의 부마국이고 군신관계의 예를 갖추라는 의미로 충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몽고의 공주를 고려에 보내 정략결혼을 통햊고려를 통제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충렬왕이 살았던 시기는 몽골이 원(元)이라는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였다. 중국을 평정하고 원을 세운 세조 쿠빌라이는 몽골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의 손자이며, 고려 충렬왕의 장인이었다. 정복하는 것보다 정복한 지역들을 잘 다스리기 더 어렵다고 하는데,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이 물려준 대제국을 잘 다스리고 넓힌 인물이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능력과 야심은 당시 고려로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원나라에 굴복한 고려는 그들의 명령을 따르는 일개 제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려가 원의 공공연한 지배권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원황실과 고려왕실간의 통혼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일찍이 고려왕들은 후비들을 왕실이나 귀족가문에서 맞아들였으나, 몽골과의 오랜 항쟁이 끝나고 나서고려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을 해야 했다.


    원이 고려왕을 부마로 삼고자 한 이유는 고려를 감시하기 위한 정략적 이유가 컸다. 이후 고려왕은 원나라 공주와의 결혼은 물론이고 원황실에 충성을 한다는 의미로 충(忠)자를 사용했다.

    고려 왕실에서 원 황실과의 처음으로 통혼한 이는 고려 25대 왕 충렬왕이었다. 충렬왕은 원종의 맏아들이자 정순왕후 김씨 소생으로 1236년에 태어났다. 1267년 태자로 책봉된 이후 원나라에 입조하여 연경(지금의 북경)에 머무르다가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하였다.


    충렬왕과 원공주와의 혼인은 1271년(원종 12) 원종이 원나라에 정식으로 청혼하면서 이뤄진 것이다. 원종은 추밀원사 김연을 원 세조에게 보내서 정식으로 청혼하였고 그 해 6월 충렬왕은 세조를 알현하고 혼인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6개월 후 충렬왕은 천여 근의 금을 마련하여 원나라로 가서 1년 반쯤 지난 뒤인 1274년(원종 15) 5월에 원 세조의 딸 홀도로게리미실 공주(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마흔이 다 된 나이로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한 충렬왕은 이미 태자로 책봉된 직후 왕녀인 정화궁주와 혼인하여 장성한 자녀까지 둔 유부남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 주어 원의 누구도 충렬왕을 가볍게 볼 수 없었다.


    혼례를 치르고 두 달 뒤 부친인 원종이 승하하자, 충렬왕은 왕위 승계를 위해 고려로 돌아왔다. 어린 나이에 충렬왕에게 시집 온 제국대장공주는 남편과의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는 않았다. 충렬왕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고 그 부인과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비록 금실이 좋지는 않았지만, 공주는 이듬해에 아들을 낳았고, 그가 충렬왕을 이은 충선왕이다. 고려 왕실 최초의 혼혈 왕이기도 한 충선왕 이후로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에서 일명 뚤루게(禿魯花)인 질자(質子)로 성장하게 되었다.

    출처 : 인물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