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직후 정부가 실시한 혼분식 운동이 무엇이고 왜 한건가요?
해방직후 우리나라는 매우 피폐해졌는데요.
이당시 정부가 실시한 정책이 혼분식 운동이라고 있던데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왜 한것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혼분식장려운동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식량 부족에 대처하는 절미운동과 식생활개선운동이 결합된 국가가 주도하는 국민동원운동이었습니다.
절미운동은 일제강점기 말 전시 체제 아래에서 전개되기 시작했지만 광복 후에도 일상이 된 쌀 부족 상태를 벗어나지 못함에 따라 실행하게 계속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혼분식 장려 운동은 1960~70년대 대한민국에서 시행한 정책으로 식사에서 주식인 쌀의 소비량을 줄이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혼식은 쌀 이외의 여러 잡곡을 섞어 먹는 것, 분식은 밀가루 음식을 말합니다.
이 정책이 펼쳐진 이유는 주식인 쌀 생산량의 부족으로, 베이비붐 등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증가하나 쌀의 생산량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고 이는 쌀 부족 현상 및 쌀값 상승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정부에서는 토지 개간 및 간척 , 신 품종 개량 및 농법 개선등을 시행했으나 이는 중장기적인 대책이라 단기적인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힘들었고, 이를 위해 정부에서는 쌀 소비를 줄이는 방안 또한 찾아야 했는데 미국에서 밀가루나 옥수수를 대량 원조했으므로 이를 이용한 것입니다.
또 당시 박정희 정부의 경제 계획으로 , 박정희 정부는 수출 지향의 공업화와 저임금 정책을 폈고, 저임금을 통해 수출 상품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이 저임금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선 노동자들이 저임금으로도 생활이 가능해야 했지만 쌀값 문제가 걸림돌이었고 따라서 쌀 소비를 줄여 쌀값을 낮추고 이를 통해 저임금 기조를 유지할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여러 방법을 찾으나, 결국 쌀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박정희 정부는 비교적 공급량이 많던 보리를 비롯한 잡곡, 미국의 지원으로 많이 풀렸던 밀을 쌀의 대안으로 국민들에게 제시하기로 결심, 이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혼분식 소비 증가에 집착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