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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우람한스컹크18323.07.23

양녕대군이 실제로 폐위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적장자였던 양녕대군이 세자의 자리에서 쫒겨나 폐세자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세종입장에서 적장자인 양녕대군은 정치적부담이 되었을텐데 왜 보호하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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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녕대군이 왜 폐위가 됐는지 정확한 이유가 밝혀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아버지인 태종과 갈등이 잦았다고 합니다.

    1418년에 유정현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동생이며, 뒷날 세종이 된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습니다.

    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녕대군은 부왕인 태종과 성격이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치밀하고 엄격한 성경의 태종에 비해 양녕은 호방하면서도 풍류를 즐기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글공부보다는 사냥이나 풍류에 관심이 많았고 글공부를 게을리 하여 주변의 사람들도 곤란을 겪었다고 합니다. 가장 큰 직접 적인 이유는 곽선의 첩 어리가 아주 어여쁠 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도 뛰어나다는 소문을 양녕이 들었는데 곽선은 중추부 부사(副使)로 재직 중이던 자였고 어리는 그의 첩이였는데 영녕대군이 이 어리와 사랑에 빠진것이 폐위된 가장 큰 이유 였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시양은 다해필담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대해 세가지로 추론하는데, 첫째로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적 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는 것,

    둘째,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 할 대 세종대왕이 몰래 양녕대군을 불러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가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세자 책봉 직후라는 설과 세자 책봉 후 어느날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설이 있고 부왕의 침전으로 문안차 들어가던 중 그는 문 밖에서 부왕 태종과 모후 민씨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게 되었고 그에 의하면 부왕 태종은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장차 백성들이 요순의 다스림을 받아 태평성대에서 살게 될 것 이라며 한탄했고 모후 민씨 역시 충녕이 맏이었어야 할 것 이라고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는데 세자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는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 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이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하며, 그해 5월 결국 세자에서 폐위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양녕대군이 왕위를 이을만한 후계자로써의 자질을 보이지 못하고, 총기를 잃어가는 상태에서 충녕이라는 유력한 왕위 계승자가 나타나자 사실상 태종은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세운 것입니다. 양녕은 동복 형이었기 때문에 충녕이 적극 보호한 것도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녕대군은 친동생 세종이 인내심 많고 성정이 어진 인물이라 예외로 천수를 누릴 수 있었던 경우에 속한다. 왕정 국가의 후계자가 낙마하면 운좋게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숨죽여 살면서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사도세자나 광해군의 폐세자 이지의 경우처럼 즉각 유배 혹은 제거되는 것이 보통이다. 반대파에 의해 옹립되어 반역의 빌미가 되는 등 좋은 후환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태종은 양녕대군이 후환이 될 것 같으면 죽여도 좋다는 유언을 세종에게 남겼고 양녕대군은 그 후에도 끊임없이 사고를 쳐서 신하들로부터 양녕대군을 벌주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을 정도였고 한번은 화가 난 세종이 그 상소들을 불질러버리라고 했다가 명령을 철회한 적도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