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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의 말똥구리
땅속의 말똥구리23.06.09

화랑제도는 신라시대에 어떤제도였나요?

화랑제도는 신라시대에 젊은 청년들의 모임이라고 들었는데요. 용맹한것이라는 건 알겠는데 화랑제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몇년도에 누구에의해 창시된 제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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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9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는 4세기 중엽을 하나의 경계로 하여 급속히 국가체제를 정비해갔습니다. 따라서, 촌락 중심의 청소년조직은 그 성장 · 발전에 커다란 지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더욱이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신라사회에 점차 친족적인 사회조직이 생성, 강화되어간 것은 추가적인 저해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6세기에 들어오면서 신라는 우경(牛耕)을 전국적으로 보급시켰습니다. 그런데 소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와의 사이에는 경작능력에 커다란 차이가 생기게 되어 촌락공동체간의 균형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도입, 시행된 군현제(郡縣制)로 말미암아 점차 공동체의 독자적인 성격마저 중앙정부에 의해 흡수되기 시작해 종전의 청소년조직은 쇠퇴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상태에서 중앙정부에 의해 제정된 것이 흔히 화랑도의 전신이라 불리는 원화(源花, 原花)제도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여러 사람을 떼지어 놀게 하여 행실을 보아서 등용하려던 제도로서, 어여쁜 여성 두 명을 가려 단장을 삼게 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원화로 뽑힌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은 무리를 3백여 명이나 모았으나, 두 여성 사이에 어여쁨을 다투며 시기하는 일이 생겨, 마침내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해 억지로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 끌어다 강물에 던져 죽여버린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결국 준정은 이 일로 인해 죽임을 당했고, 무리는 화목을 잃어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원화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나 어떻든 신라정부로서는 인재를 양성, 확보할 필요성이 그대로 남게 되었습니다.


    6세기 전반기에 신라는 주변의 조그만 나라나 가야 · 고구려와 같은 큰 나라를 상대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많은 병사를 필요로 했고, 이 때 새로운 군사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544년(진흥왕 5)에 설치된 대당(大幢)은 바로 그 핵심이 되는 군단이었습니다.


    화랑도가 국가에 의해 정식으로 제정된 것도 진흥왕 때(540∼576)의 일이었습니다. 비록 확실한 제정연대는 알 수 없으나, 562년의 대가야 정벌에 사다함(斯多含)이 화랑의 자격으로 종군하고 있는 만큼 제정연대는 이보다 빠른 시기인 것이 확실합니다.


    초대화랑은 설원랑(薛原郎)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신라 조정이 화랑도 제정을 서두른 것은 핵심이 되는 군대를 보충할 병력이 당장 필요했고, 장기적으로는 이를 통해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화랑도는 이처럼 궁극적으로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교육기관의 임무를 띠고 출발한 제도였으나, 법률로서 제정된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종전의 촌락공동체적인 청소년조직의 전통과 중국 율령(律令)의 도입을 통해서 배운 관청조직의 원리를 교묘하게 결합시켜 만든 일종의 반관반민(半官半民) 성격을 띠는 조직체였습니다.

    신문왕 때에 정규의 국가적 교육기관인 국학(國學)이 완비된 뒤에도 화랑도가 교육적 기능을 지니는 민간의 조직으로서 전과 다름없이 존속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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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기심황제님 안녕하세요.

    신라시대 화랑제도는 고대 한국의 엘리트 청년을 교육하고 훈련하기 위한 국가 후원 조직이였습니다. 화랑 군단 또는 화랑 기사단으로도 알려진 화랑은 고귀한 혈통, 재능 및 리더십 가능성을 기준으로 선발된 남성 청년들로 구성된 정예 전사 집단이었습니다 [1][3].

    화랑 제도의 정확한 설립 연도는 검색 결과에 제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흥왕(540~576) 때 이미 화랑조직을 형성한 단체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시기에 화랑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2].

    화랑 제도는 충, 효, 명예, 무술 등의 덕목을 갖춘 청년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그들은 무술, 마술, 궁술, 음악, 무용, 문학, 유교 윤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엄격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화랑 멤버들은 신체적 기량뿐만 아니라 도덕성 및 지적 발달을 강조하는 진정한 전사의 이상을 구현하도록 기대되었습니다 [1][3].

    화랑 제도는 신라 사회에서 군사력뿐만 아니라 문화 교육 기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화랑은 신라의 문화, 예술, 정치를 형성하는 데 미덕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중요한 의례와 예식에 참여했으며 심지어 국가 [1][3] 문제에 대해 왕에게 조언했습니다.

    결론적으로 화랑제도는 고대 한국의 신라시대에 설립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조직이었다. 그것은 무술 기술, 도덕성 및 지적 발달에 중점을 둔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 젊은 남성을 교육하고 훈련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화랑은 군대와 문화 및 교육 지도자로서 신라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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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화랑도는 신라가 영토를 넓히고 통일을 이루는데 데에 역할이 컸습니다. 화랑도는 신라 제24대 진흥왕 때 만들어졌습니다. 원화를 화랑으로 개편한 것은 서기 562년(진흥왕 23) 이전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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