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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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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치시마 식인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본군의 보급이 붕괴되고 먹을 것이 없을때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의 모습이 나타나긴했지만 치치시마 살인사건은 식량이 부족한 상태도 아니었는데 왜 일어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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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지치지마섬 식인 사건, 오가사와라 사건이 무엇인지가 궁금하군요.

    당시 지치섬에는 일본 육·해군 혼성 제1여단이 주둔해 섬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육군은 다치바나 요시오(立花芳夫) 소장이 이끄는 5개 보병대대 등 약 9000명의 병력으로 이뤄졌으며, 해군은 모리 구니조(森國造) 소장 휘하에 치치시마 방면 특별근거지대, 통신대 등 약 6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다치바나 중장과 마토바 소좌 등이 주동이 되어 저질렀다. 마토바 소좌는 1947년 1월 13일 도쿄재판에서 제출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고 합니다.

    1. 대대(大隊)는 처형된 미군 조종사의 인육을 먹을 것.
    2. 간무리(冠) 중위는 그 인육의 배급을 담당할 것.
    3. 사카베(坂部) 군의관은 처형에 입회하여 장기를 적출할 것.

    이후 1946년 12월 11일 도쿄재판에서의 기록에 의하면 1944년 12월 뉴기니 전선에서 제18군 사령부가“연합군의 인육을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아군의 인육을 먹으면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지침을 내렸으며, 실제로 명령을 위반한 병사 4명을 처벌했다고 되어 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본적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은 말 그대로 막장집단이었습니다.

    치치시마 식인사건 같은 비인간적 범죄가 날뛰던 곳이었고, '인권' 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조차 잡혀있지 않은 집단이었죠.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가사와라 제도는 도쿄시에서 남쪽으로 약 2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지역으로, 치치시마를 중심으로 여러 섬들이 인접해 있었다. 당시 도쿄시의 방위 요충지였던 이오지마와 도쿄시의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군수물자를 중계하는 중요한 섬이었다. 때문에 군 본부에서도 종래의 치치시마 요새 사령부를 개편하여 육군은 혼성 제1여단 등 약 9천 명을 재배치하였다.


    1944년 7월에 미군의 기동부대가 사이판을 공략하여 일본수비대가 함락되자, 미국은 사이판을 최전선 기지로 하여 연일 도쿄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였다. 이에 대본영은 미국의 다음 목표는 이오지마라고 생각하여 치치시마에 약 1만 5천 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배치하였다. 같은 해 8월 31일에서 9월 2일에 걸쳐 마침내 치치시마에 대한 공습이 시작되었다. 이때 치치시마 수비대는 고사포, 기관포로 대응하여 5기의 미군기를 격침하였으며 미군 8명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당시 격침당한 미군기에는 훗날 제41대 미국대통령이 된 조지 부시 중위도 있었다. 부시는 간신히 조종석에서 빠져나와 낙하산으로 탈출하여 미군의 잠수함에 구조되었지만 같이 타고 있던 2명의 승무원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부시는 이 사건에 대해 ‘전시 중에 경험한 최악의 일’로 자서전에서 밝히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하고 9월 2일 치치시마에 미 함대가 도착하여 다치바나 육군 중장을 정사(正使), 모리 해군 중장을 부사(副使)로 하여 항복 절차를 밟았다. 그때 미군은 1944년 8월에 포로가 된 비행사의 행방을 물었다. 이에 일본군은 처음에 방공호에서 전원 폭탄을 맞고 사망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마토바 대위의 부대를 비롯하여 일본군들에 대한 조사 끝에 미군은 1946년 2월에 ‘포로가 된 미군 비행사들이 잔학 행위를 당한 뒤 살해되어 술안주로 처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사건의 주범인 다치바나 중장과 마토바 대위 등을 괌 군사재판에 기소했다. 다치바나 등 4명은 대부분 죄를 인정하였고, 이 사건에 관계된 군인 25명은 체포되었다.


    사건의 경위는 전쟁 당시 오가사와라에 있던 육군과 해군의 고급장교들이 전쟁 말기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벌인 술잔치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다치바나 등은 미군 포로의 고기를 먹어 전의를 끌어올리고자 하였다. 큰 나무에 철사로 묶여 있던 미군 포로에게 다치바나는 “일본도의 우수함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라고 말하며 시험삼아 포로를 벨 희망자를 받아 살해하였다.

    그 후 군의관에게 유체를 해체하게 하여 연회의 안주로 삼았다. 결국 8명의 미군포로를 살해함과 함께 이를 먹은 행위로 BC급 재판에서 다치바나, 마토바 등 5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일본군은 ‘살아서 능욕의 치욕을 받지 않도록’이라는 가르침이 있어서 포로에 대한 행위는 무엇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로부터 63년이 지난 2008년 10월 25일, 당시 소위 후보생으로 오가사와라 사건을 목격했던 고(故) 쓰지야 고겐의 증언이 이루어졌다. 쓰지야는 일본 변호사들의 모임인 일변연(日辯聯) 회장을 역임하면서 전후 보상재판의 하나인 중국의 중칭폭격소송의 변호단장을 맡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1943년 11월에 학도병으로 출정하여 훈련을 마치고 1945년 1월에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1,300킬로미터 떨어진 오가사와라 제도 치치시마의 제2어뢰정 부대에 배속되었으며, 이 섬에서 200~300킬로미터 떨어진 이오지마에는 같은 해 2월에 이미 미군이 상륙한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포로가 된 파일럿은 치치시마에 배속된 부대마다 1명씩 맡겨져, 처형까지 1주일간 시간을 보낸 뒤 식인되었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이 사건에 대해서는 브래들리(Bradley)의 저서 『FLY BOYS 592 : A True Story of Courage』(TIME WARNER, 2006)에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내용은 치치시마 주변에서 추락하여 포로가 된 미군 파일럿 8인의 운명을 미국과 일본 쌍방 관계자의 증언을 기반으로 정리한 것이다.

    출처 : 일본 군인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섬의 수비를 맡은 일본 육군 중장 다치바나 요시오(立花芳夫)와 함께 있었던 일본 해군 중장 모리쿠니조 그리고 그 부하들이 미군 포로를 살해해 인육을 먹고, 대대원들에게도 인육을 강제로 먹인 엽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하급 장교들은 인육을 먹지 않았다고 상관들에게 얻어터졌던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 사건은 적군의 인육을 막고 더 치열하고 잔인 하게 적과 싸우라는 의미 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말 잔인한 일본군의 행태를 보여 줍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식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식인을 통해 수비대 장병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지치 섬의 식량상황을 보면 식량부족이 원인이 아닌 술안주감으로 포로를 잡아먹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사 결과 사건의 동기는 식인을 통해 수비대 장병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고위 장교 몇몇이 인육에 술파티를 벌린 목적이 병사들의 사기 진작이라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엽기적인 호기심, 포로를 학대하는 일본의 군사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