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금관 가야에서 금관이 뜻하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고대시대 여러 개의 가야국이 존재 하였는데요 그 중에서도 금관가야는 그 의미 금관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머리에서는 금관을 뜻하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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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
金官伽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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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중 금관이미지 갤러리 가기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중 금관
〈금관〉, 가야, 높이 11.5㎝, 지름 20.7㎝, 국보 제138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비교적 넓은 관테에 보주형 풀잎 모양 세움장식 4개가 자연스럽게 표현된 가야 전성기의 금관이다.
이칭별칭 이칭 대가락, 이칭 가락
유형 지명/고지명
시대 고대/삼국/가야
요약
금관가야는 서기 전후부터 서기 532년까지 존속하던 전기 가야의 대표적인 나라인 김해의 가락국을 일반적으로 부르던 호칭이다. 김해의 가야 세력을 가리키는 ‘금관가야’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비롯된 조어이고 가야시대에는 ‘대가락(大駕洛)’이나, ‘가락(駕洛)’으로 불리었다. 현재 ‘금관가야’라는 호칭이 널리 통용되고 있는데, 특히 고고학계에서는 변한 소국 단계의 '구야국'에서 한층 더 발전한 소국연맹 단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정의
서기 전후부터 서기 532년까지 존속하던 전기 가야의 대표적인 나라인 김해의 가락국을 일반적으로 부르던 호칭.
형성 및 변천
현재 일반인들이 김해의 가락국을 지칭할 때, 일반적으로 금관가야라고 한다. 그러나 이 명칭 그대로가 사서에서 확인되는 용례는 아니다. 『삼국유사』 5가야조에는 "5가야에 금관(金官)이 들지 않음이 당연하다" 하였고, 「본조사략」에 금관을 기록한 것은 잘못이라 전하고 있다. 금관가야는 여기에서 조합되기 시작하던 용어라고 볼 수 있다.
5가야조의 말미에는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940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금관'으로 하였다고 하였으니, 금관가야는 고려에서 비롯된 조어였고, 그와 관련된 용어를 일연선사가 『삼국유사』에 채록한 것이다. 금관가야는 지금의 가락국에 대한 명칭으로 가장 일반화된 것이기는 하나, 가야시대의 명칭은 아니다.
가야시대에 가락국 사람들 스스로가 인식하였을 명칭은 「가락국기」에 전하는 바와 같이,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불렀다는 '대가락(大駕洛)'이나, 「김유신비문」에 전하는 '가락구촌(駕洛九村)'의 '가락'과 같은 것에서 찾아야 한다. 김해의 가야국은 '가락국'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금관가야'라는 명칭은 일반인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문헌사학계보다 고고학계에서 '금관가야'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김해의 가야 정치체의 국명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고고학계에서는 소국연맹 단계에 들어간 사회를 가야로 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을 '구야국', 이후를 '금관가야'로 명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 시기는 김해 지역의 경우, 3세기 후반대로 보고 있다.
가야의 연맹왕국 단계는 변한의 소국 단계보다 한층 더 강력해진 국가권력으로 나타나는데, 그러한 고고학적 증거가 대형 분묘(김해는 초대형 목곽묘), 순장, 토기 양식의 출현 등이다. 김해 가야 세력이 소국 규모를 벗어나 연맹왕국의 맹주로서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증거가 초대형 목곽묘인 대성동 29호분의 등장이다.
김해지역에서 금관가야의 성립은 변한 속의 병렬적 소국 단계인 '구야국'이 아니라 주변 소국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려는 종속적인 지배 단계인 새로운 연맹왕국 단계로의 진입과 관련된다. 김해 가야 세력의 전성기에는 지금의 부산 및 창원 등의 동부지역을 통제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토기 양식이나 묘제에서 김해 세력을 중심으로 일정한 동질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금관은 말 그대로 금으로 만든 왕관입니다. 주로 임금이 사용했습니다. 한자로 쓴다면 金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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