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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마더77
망고마더7723.12.03

우리나라에 중화요리는 언제 처음 시작되었나요?

문득 궁금해지는데 우리나라에 중화요리는 언제 처음 도입되었으며 어떻게 전파되어 대중화가 되었는지 최초에 중화요리르 도입되어 대중화가된 역사에 대해서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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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0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중화요리의 역사가 궁금하군요.

    한국식 중화 요리는 초기만 해도 정착한 화교들 다수가 산둥성 출신이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산둥성 요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만주족 요리의 영향이 강한 만주 요리의 영향도 받았는지 만주 요리인 물만두나 군만두와 같은 요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한국에 정착한 화교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으나, 근대 들어 한국에 본격적으로 화교가 들어오게 된 것은 대략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임오군란 이후 유입된 청나라 상인들이나 쿨리 등이 시작이다. 다른 화교들도 그렇지만 이들은 음식점 사업, 건설 노동자로 유입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초기 주로 활동했던 곳은 짜장면이 탄생한 곳이라고도 알려진 인천 월미도 근처의 조계지였으며, 쿨리 노동자를 위한 음식을 만들다가 점차 고급화하여 부유한 한국인과 일본인들까지 상대하는 음식점이 성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때는 청나라 음식이라고 청요리라고도 했는데, 화교 인구가 많았던 서울이나 부산에도 유명한 청요릿집이 몇 군데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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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식 중화 요리는 초기만 해도 정착한 화교들 다수가 산둥성 출신이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산둥성 요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만주족 요리의 영향이 강한 만주 요리의 영향도 받았는지 만주 요리인 물만두나 군만두와 같은 요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한국에 정착한 화교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으나, 근대 들어 한국에 본격적으로 화교가 들어오게 된 것은 대략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임오군란 이후 유입된 청나라 상인들이나 쿨리 등이 시작입니다. 다른 화교들도 그렇지만 이들은 음식점 사업, 건설 노동자로 유입 되습었다.

    이들이 초기 주로 활동했던 곳은 짜장면이 탄생한 곳이라고도 알려진 인천 월미도 근처의 조계지였으며, 쿨리 노동자를 위한 음식을 만들다가 점차 고급화하여 부유한 한국인과 일본인들까지 상대하는 음식점이 성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때는 청나라 음식이라고 청요리라고도 했는데, 화교 인구가 많았던 서울이나 부산에도 유명한 청요릿집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당대 한국 사회에서 청요리집이 차지하는 위상은 염상섭의 소설 <삼대>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조상훈이 친구들을 불러모아 집에서 몰래 마작판을 벌이면서 청요리집에서 요리와 함께 빼갈을 배달시키고, 이 마작 모임에서 시중을 드느라 쉬지도 못하는 집안의 하인들이 '하다못해 요리라도 좀 남아있으면 기름진 청요리 맛이나 보는 재미로 참을 텐데 걸신 들린 것처럼 접시를 싹싹 비우니 힘들기만 하고 좋은 게 없다'고 투덜거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1930년대 한국에서 청요리는 가난한 사람들은 맛보기 힘든 별미로, 술과 도박으로 방탕하게 흥청망청 노는 자리에 어울리는 기름진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던 것이었고 당대 문학작품에서도 비싼 접대를 하는 배경이 청요릿집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집이 고급 레스토랑과 같았습니다. 이는 현대 한국에서도 고급 중식당이 접대 장소나 거래 장소로 기능하는 것과 같습니다. 1920년대 후반의 조선공산당 사건도 중국집에서 공산당원 젊은이들이 일본인 공무원과 친일파들을 때려눕힌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도시의 청요릿집은 홀이 아닌 방이 따로 있어 사업 접대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당시 중화요리점이 밀실 정치의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타인과 격리되어 은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다 코스 요리를 시키면 오랫동안 않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여유롭게 논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오래된 중국집에 가면 10명 내외의 소그룹이 식사를 하며 조용히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별도의 룸을 만들어 놓은 경우가 있습니다.

    현대에도 별도의 방이 마련되어 있는 중국집이 있고 이런 방은 대가족 식사나 직장인 회식 용도로 예약을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남자네 집> 을 보더라도, 한국전쟁 직후 가난했던 시절로서는 드물게 호사스러웠던 주인공의 결혼식 풍경을 설명하는 장치로 등장하는 것이 청요릿집을 빌려 벌인 피로연과 기름진 청요리를 양껏 먹는 가난한 친척들의 모습입니다.

    한국식 중국 요리가 끈적하고 진하고 기름진 맛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 역시, 20세기 초 중반 그나마 서민도 종종 즐길 수 있는 호사의 상징 중 하나가 중국 요리였던 것과 관계가 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를 거치며 일본 문화의 영향도 제법 받았습니다. 일단 우동, 짬뽕이란 단어부터가 일본식 발음이고, 밑반찬으로 단무지와 양파가 포함된 것과 그 양파를 과거엔 '다마네기'라고 꽤 불렀던 것도 이러한 영향의 일부분 입이다.

    이쑤시개를 '요지'로, 요리사를 '이다바'로 불렀던 것 등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예 일본어가 섞인 야끼만두, 야끼우동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당시엔 고급 요리였던 청요리집에 자주 방문할 수 있었던 계층은 부유한 일본인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영합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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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에 본격적으로 화교가 들어오게 된 것은 대략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임오군란 이후 유입된 청나라 상인들이나 쿨리로 다른 화교들도 그렇지만 이들은 음식점 사업, 건설 노동자로 유입되었습니다.

    이들이 초기 주로 활동했던 곳은 짜장면이 탄생한 곳이라 알려진 인천 월미도 근처의 조계지였으며 쿨리 노동자를 위한 음식을 만들다 점차 고급화하여 부유한 한국인, 일본인들까지 상대하는 음식점이 성행, 이때 청나라 음식이라고 청요리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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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에 정착한 화교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으나, 근대 들어 한국에 본격적으로 화교가 들어오게 된 것은 대략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임오군란 이후 유입된 청나라 상인들이나 쿨리 등이 시작되었고 이에 음식점 사업을 하면서 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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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 나라 중화 요리는 일제 강점기 이후 화교 들 다수가 산둥성 출신이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산둥성 요리 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만주족 요리의 영향이 강한 만주 요리 의 영향도 받았는지 만주 요리인 물만두 나 군만두 와 같은 요리도 생겨 났다고 합니다. 대중화가 된 것은 1960년대 이후 자장면이 한국식으로 변화 하면서 대중화가 이루어 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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