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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가 강제퇴위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시는 1907년 7월에 퇴위 되었으며 헤이그에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었다는 이유로 퇴위가 되었습니다. 3명의 특사가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갔으나 출입을 할수가 없고 일본의 방해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일로 한명은 울분으로 자살하고 2명은 이완용이 수배를 내려 조선으로도 돌아가지 못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한편 대한제국에는 그 빌미로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한후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을 즉위하였습니다. 그렇게 3년후 매국노중 한명인 이완용이 한일병합조약에 서명을 하여 그후로 일본이 한반도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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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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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서 도돌이표는 왜 생기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도돌이표라는 말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해방 후 교육에 쓰이던 일본어,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기 위해 용어위원회를 만들어 노력했는데 음악 분야 용어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성공을 거뒀다. 도돌이표를 비롯해 지금도 쓰고 있는 꾸밈음, 높은음자리표, 낮은음자리표, 잇단음표, 이음줄, 으뜸음 등과 같은 낱말들이 이 무렵 만들어졌다.도돌이표는 반복기호(反復記號)를 바꾼 말로 현재는 되돌이표란 단어도 드물게 쓰이지만 해방 이후 당시 음악 용어위원회는 '반복'을 대신할 말로 '도돌이'를 선택했다. 도돌이표 기호가 본래 나타내는 '다시 돈다'라는 뜻을 충실하게 적용했다면 '되돌이'도 선택되었을 것이지만 '도돌이'가 선택된 이유는 뭘까? 도돌이표에 대해 김성태 교수는 '중등악전'(1949년)에서 '국악에서 쓰는 갈말(전문용어)'로 썼고, 음악 용어위원회에 참여한 작곡가 금수현은 "이 말은 '도로 돌아'라는 말에서 온 것"(표준음악사전, 1960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국악에서 쓰는 말에서 왔다면 '다시 돌아서 들어간다'라는 뜻인 '도드리'와 비슷해 연결점이 보이지만 확정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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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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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양치질을 어떤걸로 헀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주로 자연에서 얻는 부드러운 잎사귀에 소금 으로 양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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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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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관련된 그림을 그렸던 화가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의균이 1703년 제작한 〈아미타불회도(阿彌陀佛繪圖)〉는 그의 불화 중 대표적인 작품이자 불교회화실의 가장 선배격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상적인 세계를 의미하는 불교의 정토(淨土) 중에서도 사람들이 사후 가장 태어나고자 꿈꾸었던 곳이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입니다. 배경이 생략된 공간에는 아미타불의 설법회에 참석한 여섯 보살이 둥글게 원을 그리듯 서 있습니다. 각 보살을 구별할 수 있는 도상(圖像)과 특징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관음과 대세지보살, 문수와 보현보살, 금강장과 제장애보살로 생각됩니다. 아미타불의 날렵한 신체 비례와 둥근 얼굴, 중앙 계주(髻珠)를 나타내는 대신 높은 육계(肉髻)와 뾰족하게 솟은 정상 계주를 표현한 것은 앞선 시기의 불화에서 사용되던 고식(古式)의 양식을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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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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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조선시대는 월급을 어떻게 줫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화폐의 개념도 있었지만 주로 생활에 쓰이는 쌀이나 곡식, 옷감, 땔감 등 물물교환이 가능한 물건으로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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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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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은 실화를 바탕한 소설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해번쩍 서해번쩍 정의에 사도 홍길동을 말씀하시는거라면 실화가 아니고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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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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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만들어진 영화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먼저, 세계 최초의 영화라 하면 뤼미에르 형제(형 오귀스트(Auguste:1862~1954), 아우 루이(Louis:1869~1948))의 “열차 도착”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1895년 12월 8일, 파리의 “인도살롱”이라는 홀에서 일반 관객들을 모아 입장료를 받고 영화를 상영하였습니다.이 “열차도착”이란 영화는 씨오타 기차역에 도착하는 거대한 화물열차의 모습을 찍은 3분짜리 무성영화로 이날 “물 뿌리는 정원사”와 “전구공장 노동자들의 외출”이란 영화가 같이 상영되었습니다이 “열차도착”이란 영화는 씨오타 기차역에 도착하는 거대한 화물열차의 모습을 찍은 3분짜리 무성영화로 이날 “물 뿌리는 정원사”와 “전구공장 노동자들의 외출”이란 영화가 같이 상영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것이나 제목은 없었고 후에 내용에 따라 붙여진 제목들입니다. 이 “열차도착”이란 영화가 무성영화이긴 해도 당시 영화라는 것을 처음 접해본 관객들은 열차가 진짜로 달려오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피신하는 소동을 벌였다고도 전해집니다.이 때 뤼미에르 형제가 사용한 영사기는 <씨네마토그라프>라는 기계입니다.이는 카메라와 영사기를 겸한 장치로 특히, 크기가 작고 영사장치를 겸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에디슨이 내놓은 거대한 크기 때문에 “블랙 마리아”란 별명까지 붙었던 키네토폰(촬영기), 키네토스코프(영사기)보다 단연 뛰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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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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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교회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계 최초의 교회는 당연히 이스라엘에 있죠.^^아브라함이 세계 최초의 교회라고 할수 있고요...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곧 광야 교회로서, 세계 최초의 교회입니다.[사도행전 7:38]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또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세우신 교회가 세계 최초이고,예수님 부활 이후 제자들이 모여 있던 예루살렘이 세계 최초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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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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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롱집단이 무엇을 하던곳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관롱집단의 중심은 서위(西魏) 이래 융합된 관롱호한민족 중 무력과 재지(才智)를 갖춘 사람들이었다. 황실 및 공신도 관롱집단의 핵심인 팔주국(八柱國)의 후예들이었다. 이들이 당나라의 건국자인 이연(李淵)을 옹립하였다. 즉 북주를 일으킨 우문태(宇文泰)와 당나라 이연의 조부 이호(李虎)는 팔주국의 한 사람이고, 팔주국의 한 사람인 독고신(獨孤信)의 장녀는 북주 명제의 황후, 4녀는 당 고조의 어머니, 7녀는 수 문제의 황후였다. 따라서 북주·수·당은 독고신을 중심으로 혼인집단을 형성하였다.이연 집단은 태원유수의 지위를 이용한 관료집단의 성격이 강하다. 이 점에서 당조의 지배층도 수나라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연 집단을 호족집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호족이란 누세동거(累世同居)로 결합한 종족의 혈연집단을 의미하기 때문에, 태원유수에 주둔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자뿐인 이연이 호족으로 성장하기란 어려웠다.이연 집단의 주축을 이루는 간부 31명 중 16명은 태원기의(太原起義)) 때의 대장군부(大將軍府) 문관인 장사(長史)·사마(司馬)·연속·참군(參軍)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후에 삼성육부와 시(寺)의 장관과 차관에 승진하였다. 14명은 이연의 장자 건성(建成)이 이끄는 좌령군대도독(左領軍大都督)과 둘째 아들 세민(世民)이 이끄는 우령군대도독 아래 도독장사·통군(統軍)·군두(軍頭) 등으로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후에 주로 무관 계통의 대관(大官)에 승진하였다. 이처럼 당조 창업 후인 무덕(武德) 연간에도 삼성육부의 장관과 차관에 수 또는 북조적인 관료와 동일한 관롱집단들이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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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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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족보 문화는 언제 시작된건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의 족보(族譜)는 중국(中國)의 성씨제도(姓氏制度)라 할 수 있는 한식 씨족제도(漢式 氏族制度)를 근본으로 삼고 발전하여 정착했는데, 그 시기는 1000여년(餘年)전(前)인 신라말(新羅末)·고려(高麗)초기(初期)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옛 문헌(文獻)에 보면 고구려나 백제 계통의 성(姓)은 그 계보(系譜)가 후대(後代)와 거의 연계되고 있지 않으며 다만 신라의 종성(宗姓)과 육성(六姓)[이(李), 최(崔), 정(鄭), 설(薛), 손(孫), 배(裵)]및 가락국계(駕洛國系)의 김해김씨(金海金氏)만이 후대의 계보(系 譜)와 연결 됨을 알 수 있다. 그 이후(以後)로부터는 귀족(貴族)사이에서 가첩(家牒)이나 사보 (私報)로 기록(記錄)하여왔는데, 이러한 가계(家系) 기록(記錄)은 고려시대(高麗時代)를 거쳐 조선(朝鮮) 중기(中期)에 오면서 족보(族譜)형태를 갖추는 가승(家乘)·내외보(內外譜)· 팔고조도(八高祖圖)로 발전 하게 된다. 족보(族譜)의 발행(發行)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조선초기(朝鮮初期)인 세종 5년 (1423년)의 문화류씨 영락보(文化柳氏 永樂譜) 부터 간행되기 시작했고, 그후 1476년(성종 7년) 안동 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 가 체계적인 족보형태를 갖추었으며, 현존하는 최고(最高)의 족보로는 문화류씨 두번째 족보인 1562년(명종 17년 간행의 10책)의 가정보(嘉靖譜)이다. 이밖에 조선(朝鮮)초기(初期) 간행(刊行)된 족보(族譜)는 남양홍씨(南陽洪氏,1454), 전의이씨(全義李氏,1476), 여흥 민씨(驪興 閔氏, 1478), 창녕 성씨(昌寧 成氏, 1493)등의 족보(族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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