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무인 척준경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척준경은 당시 기록으로 보았을 때 개인의 무력이 뛰어난 무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척준경에 대한 기록 자체가 고려사의 반역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척준경에 대한 기록을 일부러 부풀릴 필요가 없는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들 자체가 개인의 무력이 뛰어나다는걸 알려주고 있어 현재에는 소드마스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척준경이 처음 등장했던 1차 여진 정벌 시기에 품계도 없는 하급 병졸 시절, 고려군이 포위당해 있을 때 척준경이 당시 지휘관인 임간에게 말 한필과 무기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원래 말단 병사가 이런 요청을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나 시기가 시기인 만큼 임간은 말과 무기를 주었고, 척준경은 홀로 가서 적장 둘을 베고 옴으로써 여진의 포위를 뚫어냈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윤관(여진 정벌 시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의 눈에 들어 그의 밑에 있을 때, 가한목 전투라고 윤관이 여진족에게 포위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척준경은 결사대 10명과 함께 윤관을 구출하러 뛰어들었고 윤관을 구출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여진족 30여명을 혼자서 죽였다고 나와 있습니다.이외에도 다양한 전투에서 단신으로 적군 10~30여명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많이 나와있고, 패배한 기록이 없어 현재에 무력이 뛰어난 소드마스터 별명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현대에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는 드라마 도깨비의 공유 캐릭터인 '김신'의 모티브가 척준경을 모티브로 되었다고 알려져 있어, 현대에 더 유명해지긴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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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 이후에도 한문이 지배적이었던 이유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세종 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에도 한문이 지배적이었던 이유는, 당시의 기득권이 양반들이었기 때문입니다.언어와 글자라는 것은 사실 배움에 있어 가장 처음이 되는 요소입니다. 조선은 이런 글자를 양반들에게만 허락하고, 양반들만이 배움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하여 왔습니다. 훈민정음의 가장 첫 장에 나오는 세종 대왕의 한글 창제 이유도 중국과 말이 달라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기에, 이를 가엽게 여겨 한글을 창제하였다고 써있습니다. 세종은 한글을 통해서 백성들을 계몽하고자 하였습니다.하지만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던 양반들은 당연히 백성들이 배우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양반들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한글을 꽤나 많이 사용하긴 하였으나, 양반들은 "언문"이라 하여 한자보다 아래의 글자로 낮추어 불르고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 창제 이후에도 주로 사용하는 언어는 한자였습니다.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자음 17자·모음 11자로 총 28자였고, 현재는 자음 14자, 모음 10자로 총 24자 입니다. 없어진 글자들은 키보드 자판에서 보여드릴 수 없으나, 유성음으로 세모 모양의 반치음, 옛 이응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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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님은 어느 해전에서 돌아가셨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이순신 장군님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셨습니다.노량해전은 정유재란때인 1598년 11월에 있던 해전으로, 이순신 장군님과 진린 장군이 이끄는 조명연합군과 전쟁에서 패배하여 후퇴하는 일본군과의 전투였습니다. 당시 일본군 지휘관이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일본에서 수군으로 가장 유명한 가문인 시마즈 가문의 수장이었으며, 고니시 유키나카의 군대를 구출하기 위해 온 시마즈의 함대를 관음포에서 포위하여 괴멸시켰던 전투였습니다.이순신 장군님의 전사에 대한 기록으로는 전선 앞에서 직접 활을 쏘며 전두지휘하던 중,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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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 당시에 이탈리아는 왜 독일과 편을 먹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제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기 전,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에 의한 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을 기반으로 힘을 키워 39세에 이탈리아 총리로 취임하였으며, 독일과 힘을 합치게 된 시점은 에티오피아 침공 전후로 보고 있습니다.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과거 로마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슬로건으로 아프리카 침공을 계획중에 있었고, 당시에 힘을 키우고 있던 나치 독일의 확장을 보면서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영국/프랑스보다 독일과 밀착하게 됩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탈리아가 독일과 같이 추축국의 중심까지 될 생각은 없었는데, 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인 독일의 폴란드-프랑스 침공을 보고 실제로 프랑스를 점령하는 모습을 보면서 승기를 잡은 독일에 합류하여 추축국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추축국 참전은 실리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무솔리니의 행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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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 재미있나요? 볼까 말까 하는데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왕과 사는 남자는 계유정난 이후 단종의 유배 생활을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계유정난은 단종의 삼촌이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던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좌를 탈취하려한 사건으로, 당시 실권자였던 김종서를 축출하고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후 단종을 압박하여 왕권을 양위받아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후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를 하게 되면서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등, 영월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왕과 사는 남자는 이 유배에 대한 이야기로 등장 인물들의 이름을 잘 보시면서 영화를 보시는걸 추천드립니다. 추가로 한국사를 공부한지 오래되어도 볼만한 영화입니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아 몰입하여 보기 좋은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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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도를 보면 북쪽을 위로 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북쪽을 지도의 위로 한 이유는 나침반의 사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지도를 읽을 때 위를 북쪽으로 두는 이유는, 나침반과 같이 사용 시 나침반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지도를 보고 읽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침반과 지도의 방향을 일치시켜야, 실제로 길을 찾을때 동/서쪽(우측과 좌측)을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침반 이전에는 바다에서 북극성을 기준으로 길을 많이 찾았기에, 북쪽을 위쪽으로 바라보고 지도를 보는게 보편화되어 지도의 위쪽 = 북쪽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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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능력검정 시험 인강 추천이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인강으로 가장 많이 듣는건 큰별쌤 최태성 선생님 강의를 많이 듣습니다. 책만 사면 강의는 무료로 들을수도 있기 때문에 주변에 추천도 많이 하고 있고, 한국사에 대해서 쉬우면서도 포인트를 잘 잡아서 알려주시기 때문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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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는 몽골에서 유래되었다고 들었는데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문의주신 것과 같이 소주는 몽고의 고려 침공 시기에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주의 주조 방식은 증류수로 시작은 페르시아에서 연금술사들이 불로장생의 약을 연구하다 알콜을 증류하는 법을 알아내었고, 이것이 리큐르나 소주와 같은 술로 발전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증류 방식의 술이 몽골의 침략 시대때 들어왔다고 합니다.한국의 전통주로는 막걸리, 청주, 약주 등의 양조주였습니다. 증류수와는 다른 제조 방식으로 주로 곡물을 누룩으로 발효시켜 제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먹걸리에 대한 정확한 기원은 기록된 바가 없으나, 고조선 시대 [공무도허가]에도 술에 대한 기록이 나와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 시대부터 존재 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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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무당은 조상이든 신이든 뭔가 알려주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비과학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진짜인지 아닌지는 증명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본다면 무당의 기원은 고조선 이전부터 있던 제사장부터 현재까지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보았을때도 중국의 도사나 일본의 음양사, 아시아 문화권의 샤먼이나 서양문화권의 퇴마사, 마녀 등 신이나 귀신과 관련된 토속 직업은 계속해서 존재해왔습니다.개인적으로는 단순 인간의 공포심이나 미래에 대한 궁금증으로 속임수를 행하며 지금까지 위의 직업들이 이어져왔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무당의 경우 귀신에 대해 정리한 학문도 있는것으로 보아 마냥 속임수라고만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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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전날 왜 밥을 많이먹는 풍습이 생겼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정월 대보름은 우리의 민속 명절로, 기원도 우리나라의 역사에 기원이 있습니다. 신라시대 소지 마립간의 목숨을 구한 까마귀를 기리기 위한 풍습으로 시작되었으며, 그래서 오기일(까마기를 기리는 날)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설날 이전에 우리나라의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였기 때문에 1년의 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여러가지 풍습이 있습니다. 문의주신 밥을 여러번 먹는 다는 것은 사실 오곡밥, 찰밥, 부럼, 나물 등을 꼭 먹어야 1년의 복이 들어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주 먹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의 풍습으로는 자주 먹을 필요는 없고, 위의 것들을 꼭 챙겨 먹는게 풍습이었습니다.이외에도 귀밝이술이라 하여 찬술을 먹는 것, 액운을 내쫒기 위해 짚을 태우는 달집 태우기, 쥐불놀이 등을 해야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조선시대로 들어오며 중국 절기를 많이 따르다보니 설날의 의미가 더 크게 되었고,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월 대보름의 영향력은 좀 더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날에는 이러한 풍습만 남아있고 지키는 사람들도 일부만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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