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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기 서인구가 동인으로 나뉘어졌던 까닭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건국 당시 건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혁명파 신진사대부는 15세기 초 훈구파로 이어졌고, 건국을 반대한 온건파 신진사대부는 사림으로서 향촌에서 사학으로 학맥을 유지해 왔습니다. 성종대 비대한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 사림을 3사의 언론 기관에 등용했습니다. 그러나 성종 사후 연산군 때부터 훈구 주도로 정치적 보복이 거듭되었는데, 주로 사림이 피해를 입게되어 '사화'라 합니다. 그렇지만 사림은 향약을 통해 향촌에서 지배권을 장악하고 서원을 통해 학문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결국 선조대에는 사림이 정권을 장악합니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사림은 제한된 관직과 경제적 이권을 장악하기 위해 분당합니다. 특히 기성 사림인 신의겸은 명종비의 동생으로 외척 출신입니다. 명종 당시 을사사화로 피해를 입었던 사림은 외척 정치를 적폐라 여겨 청산 대상이었습니다. 과거를 통해 새롭게 관직으로 진출한 김효원 등 신진 사림은 신의겸 등의 기성 사림에 대한 반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효원도 명종비의 외척인 윤원형과 연결되어 있다고 이조 전랑에 추천되는데, 신의겸 등의 기성 사림으로 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이조 전랑은 비록 품계는 5품 정도로 낮으나 3사 및 후임자 추천권이 있어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관직입니다. 이후 신의겸의 동생인 신충겸이 이조 전랑의로 추천되자 다시 김효원 등 신진 사림 등이 반발하자 격론은 두 세력으로 나누어 대립하였습니다. 당시 김효원과 신의겸의 집이 한양의 동서에 있어 동인과 서인이라고 합니다. 정리하면,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는 배경은 제한된 관직과 경제적 이익을 놓고 사림들간의 대립입니다. 직접적 계기는 척신 정치 잔재 청산에 대한 기성(온건/신의겸)과 신진(강경/김효원)사림들의 정파적 대립에서 출발합니다. 이후 이황, 이이의 학문적인 차이인 학파적 분열까지 더해집니다.
학문 /
역사
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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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요서경략설은 왜 정설이 아닌 건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제 근초고왕 당시는 중국의 남북조 시대로 분열되어 매우 혼란한 시기입니다. 백제는 남북조의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중국의 요서, 산둥반도까지 진출했다는 근거가 중국 사서 송서, 양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당 지역에 대한 진출 및 직접 통치에 대해서 동시대 북조와 삼국사기 등에서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삼국사기를 정사로 여기는 우리나라 한국사 연구 풍토도 요서 경력설을 100%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일본의 임라일본부설, 일본내 삼국 분국설 등 본국 중심의 확장적 해석이 가능하지만 조심해야할 역사적 관점입니다. 백제의 요서 경략설에 대해 아직까지는 진출, 또는 무역 거점 정도로 서술되고 있지만 지속적인 후속 연구를 통해 충분히 정설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학문 /
역사
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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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