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복군이 창설된 시기는 언제인가요?
대한광복군은 혹시 한국광복군을 말하는 것인가 궁금합니다. 유사한 조직으로 여러 단체가 존재했는데, 1915년에 박상진의 주도로 조직한 대구에서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1914년 연해주에서 이상설, 이동휘가 주도한 대한광복군정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한광복단은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 선생이 주도하여 조직한 광복단으로 후에 조선국권회복단과 통합되어 대한광복회로 발전합니다. 만약, 한국광복군을 의미한다면, 1940년 9월 충칭에서 창설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속 독립군 부대를 말합니다. 한국광복군은 1941년 대일대독 선전포고, 1943년 인도미얀마 작전 참전, 1945년 미국과 협조하여 OSS특수훈련과 국내 정진군 조직 등의 활약을 하였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세종 시기 신백정과 관련된 질문입니다!
백정은 본래 고려시대 일반 평민을 의미하였습니다. 즉, 국가에 대한 직역이 없어 토지를 지급받지 못했으나 조세, 역의 의무를 다해 과거를 통해 관리로 진출할 자격을 갖춘 일반 백성을 말합니다.그런데, 조선이 개국하고 세종은 천민 신분에 해당하는 재인, 화척을 일반 백성에 해당하는 백정으로 명칭을 통합하였습니다. 즉, 고려시대 천민 계급을 양민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백정;은 여전히 종사하는 직업으로 인해 천시당했으며, 일반 백성들도 백정으로 불리는 것을 꺼렸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 백정은 고려의 백정과는 다르게 차별된 신분으로 고정됩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대규모로 철폐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흥선대원군은 1863년 고종의 즉위와 함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통치 체제의 붕괴되고, 민생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집권후 통치체제를 재정비하고,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제도 개선에 주력했니다. 특히 서원을 철폐하여 민생 안정과 재정을 확충했습니다. 서원은 선현을 제사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교육기관, 그리고 붕당의 근거지였습니다. 하지만 서원은 지역민을 수탈하고, 붕당 정치의 모순의 소굴이었습니다. 비록 양반들의 반발이 컸지만 서원 철폐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재정을 확충하였으며, 붕당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한국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서 혹시나 조금 더 우월한 뭔가가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나라 여성들의 여성상은 '어머니'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과거 전통 사회에서 유교적 질서 속에서 여성은 사회적으로 차별받았으며, 제한받았습니다. 그리고 개화기, 일제강점기, 산업화를 거치면서도 전통적 질서는 유지되어 왔습니다. 전쟁, 가난 속에서 억척스러운 생존으로 가족의 생계와 자녀를 양육하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생존을 위한 억척스러움과 '한'은 가정과 사회 교육으로 계승되었으며, 이는 강한 한국 여성상으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5.0 (1)
응원하기
과거엔 왜오랫동안 동서양엣 금이 아닌 은화가 주 화폐로 쓰였나요
은화가 동서양의 역사에서 금보다 오랫동안 화폐로 사용한 것은 우선 희소성 문제입니다. 금도 매우 가치 있는 금속이기 때문화 화폐가치로 활용되었지만 은보다는 희소하였기 때문에 유통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보다는 은이 일상에서 결제에 편리합니다. 즉, 금은 보관이나 저축에는 유리했지만 소액 거래에는 은이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5.0 (1)
응원하기
중국 진나라나 수나라와 일본제국의 공통점
인류와 국가 발전 과정에서 분열과 통합의 역사를 반복합니다. 일부 통일 국가는 내부 과잉 팽창으로 단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나라는 전국시대를 통일했지만 강압적인 법가 통치와 무리한 대토목 공사로 15년 만에 멸망합니다. 수나라 역시 무리한 대외 정복 활동과 대운하 건설 등 무리한 토목공사에 대한 반발로 단명합니다. 19세기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들이 제국으로 발전하여 식민지를 넓힌 국가들도 있습니다. 영국과 일본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나라들은 무리한 영토 침략과 피정복 지역에 대한 강압적 통치, 그리고 그에 따른 반발로 인한 부작용이 공통점입니다.
평가
응원하기
고구려랑 백제는 동명왕 자손으로 뿌리가 같잖아요
고구려와 백제는 동명왕의 자손으로 뿌리가 같습니다. 동명왕(주몽)은 졸본부여에서 소서노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 형제를 낳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여에서 첫부인의 예씨 소생인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자 두 형제는 남하여 백제와 비류를 건국하였으며, 이후 온조가 통합되었습니다. 하지만 4세기 삼국이 주도권 쟁탈 과정에서 적대적 관계로 전환하였습니다. 4세기에는 근초고왕이 북진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5세기에는 오히려 남진 정책을 개로왕을 전사케 하는 등 적대적인 관계로 전환하였습니다. 즉, 같은 뿌리라 해도 영역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통합 대신 패권 다툼을 하였습니다.
5.0 (1)
응원하기
조선시대 유배지는 어떻게 정해졌나요?
조선시대 유배형은 태, 장, 도, 유, 사 가운데 하나로 지의 무게에 따라 장 100대와 유 2000리, 2500리, 3000리로 구분했습니다. 세종 12년 때 유 2000리는 600리밖, 2500리는 750리밖, 그리고 3천리는 900리 밖으로 제주나 흑산도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도간 교차로 전라도 거주자는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등 타도를 우선하였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세르비아는 오헝제국때는 민족이 어쩌니 인권이 어쩌니 하면서 정작 유고슬라비아때는 역으로 탄압한 이유가 뭔가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세르비아는 대세르비아주의를 표방하며 독립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결국 1878년 베를린 회의의 결정에 따라 1882년 세르비아가 독립하였습니다. 그리고 1918년 1차 대전 세계 대전 승리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반면에 유고슬라비아 시기 세르비아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오히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 다른 슬라브 민족에 대해 중앙 집권 통치는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결국 부작용으로 1980년 티토 사후 밀로세비치 등장, 1990년대 연방이 해체됩니다.
평가
응원하기
조선에서 유배를 가게 되면 유배지에서 알아서 먹고 살아아 했나요?
조선시대 유배지에 해당하는 고을은 원칙적으로 최소 유배인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즉 고을에서 후원인을 지정해 교대로 식량과 의복을 제공하고, 관에서 보조금을 지급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분에 따라서는 사비로 몸종이나 집안의 지원을 받으며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빈곤한 유배인은 자력으로 생존해야 했기 때문에 장사, 날품팔이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