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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야트족이 현존하는 부여, 부여족의 현존후손 이라는 역사적 근거는?
부리야트라는 종족이 부여, 불여, 불루, 비류 등과 음운과 의미적으로 관련 있다는 주장이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리야트 일부 집단이 고려, 고리, 고구려의 어원이라는 설, 곰을 토템으로 하는 전통에서 고구려, 부여와 민속적으로 연관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문헌상으로도 <북사 실위전> 등에 부여-고구려-몽골-거란 언어가 같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코리-부리야트족'이 남하해 부여, 고구려, 백제 등 맥족 국가의 기원이 되었다는 민족 이동설을 제기하도 했습니다. 또한 두상, 얼굴, DNA 일부 계통이 부리야트인을 포함한 바이칼 일대 시베리아 원주민 몽골계, 한국인이 서로 가깝다는 것으로 보고된 연구도 있습니다.하지만 부리야트족과 부여족의 관련성은 민속, 언어, 문화적 유사상과 주장 수준에서 논이되고 있지만 역사적, 생물학적 현존 후손이라는 근거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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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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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도 내부적으로 여러 계급이 있었나요?
암행어사는 내부적으로 별도의 계급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암행어사에게 지급된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수는 임무 수행에 동원할 수 있는 역마의 수를 말합니다. 이는 암행어사 계급이나 서열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암행어사의 품계(직급)는 일반적으로 종2품(또는 정3품) 수준으로, 이는 지방 관찰사(도지사급)나 수령(군수·현령 등)보다 높은 지위였습니다. 암행어사의 신분과 직무는 왕이 직접 비밀리에 임명했고, 중앙 고위관리급 인물이 암행어사로 파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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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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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지금과 같은 도서관 사서 인물
조선시대 도서관 역할을 한 것은 집현전, 홍문관, 규장각 등이 있습니다. 이들 기관은 국가의 중요 문헌과 서적을 보관, 정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성균관, 서원, 향교 등 교육 기관도 책을 보관하고 열람하였습니다.그리고 사서 역할을 한 직책으로는 집현전의 전적, 존경각의 전적과 사예, 학정, 그리고 규장각에는 검서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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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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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중국과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고대/중세에 결투 문화가 없나요?
우리나라에서 결투문화가 자리잡지 못한 이유는 삼국 시대 이후 대체로 중앙집권적 왕권과 공식 관료제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신분제, 관료제가 엄격했고, 분쟁이나 논쟁은 공식적으로 율령에 의해 사법, 행정적으로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즉 공권력 외에 명예, 재산 문제를 사적인 결투에 의해 해결하는 것은 위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려, 조선으로 갈수록 유교적 질서가 강화되어 개인적 명예나 무역 과시가 공동체의 화합과 예, 질서에 어긋난다고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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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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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역사 기준은 뭔가요?????
몽골 역사는 주로 몽골 고원 지역에 있었던 국가들을 포함합니다. 몽골족 국가는 몽골 역사에서 기본적으로 중심적으로 다룹니다. 하지만 튀르크 국가들도 오랫동안 몽골 고원과 그 주변을 실질적으로 지배했으므로 몽골의 선대 국가로 함께 학습하거나 언급됩니다. 몽골에서 흉노, 돌귈 위구르 등 튀르크 유목 제국들까지 몽골 고원사의 일부로 배우거나 몽골족 직계 시조가 아니라도 몽골의 선대 세력, 몽골 고원의 주인으로 역사를 교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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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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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룡은 어떻게 유비를 따르게 되었나요?
조자룡은 삼국지에서 촉한의 충직한 장수입니다. 유비와의 인연은 관우, 장비와 달리 조금 복잡합니다. 조자룡은 기주 상신 출신으로 처음에는 하북의 유력자인 공손찬의 부하였습니다. 당시 유비도 공손찬 휘하에서 몸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조자룡은 공손찬과 원소 전추 중에서 유비와 함께 싸우며 서로 알게되었으며, 유비의 인품에 반했습니다.두 사람은 이 시기부터 오랜 유대와 신뢰를 쌓게 되었습니다. 이후 조자룡은 형의 장례를 이유로 공손찬을 떠나 일시 귀향했으며, 이때 유비도 잠시 이별합니다. 조자룡이 원소를 잠시 거쳤다가 다시 유비를 찾아가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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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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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하회탈같은 탈을 썼던 이유는 뭘까요?
과거 우리나라에서 하회탈과 같은 가면을 썼던 이유는 종교적, 주술적이고 신앙적 의식과 관련됩니다. 탈을 써서 사악한 영이나 잡귀를 쫒는 의식과 축제에서 사용하였으며, 장례식이나 마을 굿, 설날 행사 등에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상징으로 쓰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나 죽은 사람, 동물, 요괴 등 비인간적 존재로 가장해서 주술적 힘을 얻거나 신성을 표시합니다. 그리고 사냥 전후 농경 사회의 의례에서 동물 모습 탈을 써 풍요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탈의 기능은 점차 탈춤, 공연과 문화 예술로 승화되었습니다. 하회탈, 각시탈, 사자탈 등 다양한 민속 예술로 발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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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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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유교는 언제 도입된 문화일까요?
우리나라에 유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는 삼국시대입니다. 유교의 충, 이념은 국가 통치이 유요아기 때문에 삼국은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통치 체제 정비에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활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소수림왕은 372년 태학을 설치하여 유교 경전을 교육하고, 백제도 오경박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라도 임신서기석 등에서 유교 교육을 장려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유교의 기본 윤리와 예절, 효, 충성 등의 가치가 우리나라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기는 했지만, 유교가 사회 전반의 통치 이념이 되고 본격적으로 꽃피운 시기는 특히 조선시대부터입니다. 이때는 유교, 특히 성리학이 국가의 공식 이념이 되었고, 사회 질서·풍습·교육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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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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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고구려 관련 기록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우선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국왕의 명을 받아 기술한 관찬사서입니다.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기전체로 기술했습니다. 삼국유사는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사찬사서로 불교적 색책가 강합니다. 고구려 기록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는 연대기적, 사실 중심으로 기술했습니다. 반면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신화나 전설, 불교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기술했습니다. 같은 인물이어도 더 신비롭고 상세하게 묘사한 경향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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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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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때 보통은 3일장을 치루는데 이유가 있나요?
한국에서 장례를 3일 하는 이유는 유교적 예법에 따른 것입니다. 즉 고인의 혼이 완전히 떠나 이별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3일 정도 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3일라는 기간 동안 조문객들이 애도의 뜻을 표하고 가족이 장례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도 3일만에 장례를 치른 사례가 기록에 남아 있으나 전통저긍로 3년상, 1년상 등 훨씬 긴 상례가 일반적이었습니다. 3일장은 고려 후기 이후 일부에서 허용되었고. 실제로는 조선시대까지 예를 다해야 한다는 이유로 널리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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