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프로필
프로필
답변
잉크
답변 내역
전체
학문
우리나라 최남단섬이라고 있는 이어도는 전세계에서 섬으로 인정받는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제 사회는 소코트라 암초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이어도의 이름에 도가 붙은 것은 국제법상 섬 의 정의와 무관합니다.
학문 /
역사
23.12.11
0
0
삼수채전투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010년 11월 25일부터 12월 초까지 전개되는 통주전투는 삼수채전투와 통주성전투로 구분되며 삼수채전투는 통주성 밖에서 이루어진 전투로 고려 강조의 군대가 거란군에게 패했습니다. 통주성전투는 삼수채전투의 승세를 탄 거란군이 통주성을 공격해 이루어진 전투로 중랑장 최질 , 홍숙 등의 고려군이 성을 끝까지 고수해 고려가 승리합니다.고려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한 거란은 두 차례의 침공이 실패로 끝나자 성종이 친히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공격, 거란군은 1010년 11월 중순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진장 양구, 이수화 등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성을 함락하는데 실패, 이에 11월 23일 군사를 통주로 옮겨 25일부터 12월 초까지 이곳에 고려와 거란 사이의 전투가 재개되었습니다.당시 통주에는 행영도통사 강조가 군사 30만명을 거느리고 거란에 대비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강조 휘하의 고려군은 통주성을 나와 청강의 3개 지류가 합쳐지는 합수목인 삼수채 지역에서 거란군을 만나 초반에는 전과를 올리나 초반의 우세에 자만한 강조가 전장에서 장기를 두는 둥 지휘를 소홀히 했고, 이때 거란의 야율분노가 삼수채를 기습 공격해 강조를 생포하고 3만 여 급을 베었습니다.거란군은 산수채전투의 승세를 타고 통주성까지 공격하였으나 중랑장 최질, 홍숙과 방어사 이원귀, 부사 최탁 등이 성을 굳게 지켜 결국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부근의 여러 다른 성만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12.11
0
0
한국에 산타문화는 언제 처음 도입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반도에 최초 성탄절이 들어온 것은 1884년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산타의 경우 4세기 동로마 제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가난한 집에 세 딸이 돈이 없어 결혼도 못하는 사연을 듣게 된 당시 니콜라우스는 그 집에 굴쪽에 금 주머니를 떨어트렸는데 그게 양말속으로 들어갔고 이때부터 벽난로의 양말을 걸어두고 자면 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준다는 유래가 있습니다.이것이 1884년 갑신정변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학문 /
역사
23.12.11
0
0
한강을 아리수라고 부르는데요 아리는 무슨 뜻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리수는 한강과 압록강을 부르는 고어 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한강에서 취수한 수돗물의 브랜드 이름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 의미는 크다 라는 뜻을 가진 아리 에 물 수 가 분은 것으로 보이며 아리 그 자체로 물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학문 /
역사
23.12.11
0
0
스포츠 클라이밍의 유래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원전 200년 그림에 암벽 등반을 하는 중국 남성이 그려져있으며 12세기 절벽에서 살던 아나사지는 뛰어난 클라이머로 여겼습니다.근대 유럽인들은 정상에 도착하기 위한 고산 등반 기술의 하나로 여겨 암벽 등반 기술을 단련, 1880년 대 유럽인들은 암벽 등반을 고산 등반의 기술이 아닌 독자적인 분야로 분류했습니다.초기 암벽 등반은 인공등반의 형태로 행했고 1920년~1960년대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등반 기술, 등반 장비, 등반 윤리가 진화했으며 오늘날 장비는 안전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자연적인 암벽 돌기를 이용해 오르는 자유등반은 가장 인기있는 등반 방식이 되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12.11
0
0
만리장성이 외세의 침략에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만리장성은 흉노족이나 몽골족 같은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전국시대 건설이 시작되어 후대 왕조에 의해 확장, 보수되어온 인류 최대의 성곽 구조물입니다.
학문 /
역사
23.12.11
0
0
김승옥의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소설의 주제가 뭔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 소설은 1960년대 한국 도시의 현상을 6개의 장으로 서술한 것으로 도시에 갔다가 실패하고 고향에 돌아와 침묵으로 일관하는 누이와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 도시에 온 주인공의 삶을 통해 도시화에 따른 인간성 상실과 도시인들의 타락한 삶을 고발합니다.즉 주제는 도시화에서 비롯된 삶의 개별화 현상과 가치의 상대화, 자기 정체성을 잃은 자의 방황과 파탄의 내면 풍경 입니다.
학문 /
문학
23.12.11
0
0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조선이 얻은것과 잃은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은 서양 열강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할수 있었으나 변화하는 세계 정세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신미양요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는 승리였으나 군사적으로는 참패한 전쟁이었습니다.1866년 만든 척화비를 1871년 전국적으로 세운 것은 위기의식의 발로였으니 병인양요에서는 승리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수있었으나 신미양요는 그렇지 못했다는 의미로, 신미양요 이후 오경석 등의 개항가가 출현하는 계기가 됩니다.흥선대원군은 서양의 침략을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데 활용, 화이관에 입각한 강경한 배외적 태도를 취합니다.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세계 정세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어렵게 했습니다.
학문 /
역사
23.12.11
0
0
고려의 장군 양규와 척준경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양구는 고려전기 형부낭중, 도순검사, 공부상서 등을 역임한 무신입니다.복종때 형부낭중이 되었으며 1010년 거란의 성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흥화진을 포위하자 도순검사가 되어 진사 정성과 부사 이수화, 판관 장호 등과 더불어 성을 굳게 지키며 완강히 저항하고 항복 권유를 물리쳤습니다.이에 거란군른 포위를 풀고 통주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 부대를 격파한 뒤 남진, 거란군은 이때 사로잡은 노전을 흥화진에 보내 항복을 권했으나 오히려 노전을 사로잡고 성을 더욱 굳게 지켰습니다. 그 뒤 군사 700여명을 거느리고 흥화진을 출발해 통주에서 강조의 부하였던 병사 1000여 명을 수습해 곽주에 머무르고 있던 거란병 6000여 명을 공격해 성을 탈환하고 성 안에 있던 남여 7000여 명을 통주로 옮겼습니다.1011년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란 가나 거란군과 철병교섭이 성공해 거란군이 물러가게 되니 이에 양규는 구주방면으로 돌아가는 거란군을 지키고 있다 무로대에서 2000여 명을 베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2000여 명을 탈환, 석령에 이르러 다시 2500여 명을 베고 포로가 된 1000여 명을 탈환시켰습니다.또 여리참에서 싸워 1000여 명을 베고 포로가 된 1000여명을 탈환, 다시 거란의 선봉과 애전에서 싸워 1000여 명을 베었습니다. 이때 거란의 군사가 갑자기 몰려와 구주별장 김숙흥과 더불어 싸우나 남은 군사가 얼마 되지 않고 화살이 떨어져 진중에서 전사합니다.양규는 고군으로 한 달 사이 7차례 싸워 적을 6500명 베고 포로가 된 백성 3만 여명을 구하고 낙타, 말, 병장기 등 노획물을 헤아릴수없을 정도로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척준경은 고려 중기 무신입니다.주리의 집안으로 태어나 가난해 학문을 닦지 못하고 서리가 되고자 하나 이것도 여의치 않아 무뢰배들과 교유, 이후 계림공의 종자로 있다 추밀원별가가 됩니다.1104년 평장사 임간을 따라 동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천우위녹사 참군사에 제수되었습니다.1107년 중군병마녹사로 윤관을 따라 동여진 정벌에 종군해 석성, 영주 전투에서 크게 이겨 그 공으로 합문지후에 제수되고 다시 길주전투에서 공을 세워 공부원외랑이 됩니다.1117년 급사중으로 서북면병마부사가 되고 지어사대사를 역임, 1119년 동북면병마사, 1122년 위위경 직문하성을 거쳐 1123년 이부상서 참지정사, 이듬해 개부의동삼사 검교사도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에 오릅니다.곧 관직에서 물러나 스스로 고향인 곡주로 돌아가자 인종이 이를 만류하며 문하시랑평장사에 전보, 1126년 내시지후 김찬, 내시녹사 안보린 등의 거사를 계기로 이자겸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궁궐에 침범해 불사지르고 이들을 살해합니다.이어 문하시랑 판병부사가 되나 왕의 밀지를 받은 최사전의 설득으로 뜻을 바꾸어 이자겸을 잡아 귀영보냈고 그 공으로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에 삼중대광 개부의 동삼사 검교태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이 되고 처 황씨는 제안군대부인이 됩니다.이듬해 권세를 함부로 휘둘러 인종의 미움을 받다 1127년 이자겸을 제거한 일은 일시의 공이나 궁궐을 침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의 죄다 라는 좌정언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암타도에 유배, 이듬해 곡주로 이배됩니다.1130년 죄는 중하나 또한 공도 적지 않다하여 처자에게 직전을 돌려주었고 1144년 지난 날의 공으로 조봉대부 검교호부상서에 기용되나 곧 별세합니다.1146년 문하시랑평장사로 추복되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12.10
0
0
자객열전에 나오는 인물 중 형가는 어떤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형가의 조상은 강제의 간신이었던 경봉이었으나 태어난 곳은 위나라였고 본인이 사는 곳은 연나라 입니다. 왜냐하면 초 영왕때 오나라에 의탁한 경봉과 그 일족이 초군에 의해 주살된 후 그 후손들이 성을 바꾸고 여기저기 흩어졌기 때문이며 형가는 꼬마때부터 책읽기와 검술을 좋아했습니다. 검술로 당시 위나라 군주였던 원군에게 출사했으나 외면당합니다.형가는 개섭이라는 검객과 검술을 논하다 틀린 사실을 말했고 말다툼이 일어나는데 개섭이 노려보자 형가는 말없이 도망칩니다.조나라의 수도 한단에 머물 당시 노구천이란 사람과 장기를 두다가 말다툼을 하는데 노구천이 죽일 듯이 위협하자 형가는 도망쳤고 사이가 틀어집니다.이를 두고 형가가 겁이 많았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으나 사람도 죽여본 진무양이 벌벌 떨 때 태연하게 시황제에게 다가가서 검을 휘두른 것만 봐도 형가는 용기와 담력이 어마어마한 사람이었습니다. 사기 같은 역사서에서는 형가가 훗날 큰 일을 맡을 뜻이 있어 사사롭게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싸움을 피했다고 봅니다.그 후 시전 바닥에서 개백정인 아무개, 축쟁이 고점리와 띵가띵가 놀며 소일하였고 감정이 복받치면 셋이 얼싸안고 울다가 웃다가 했다고 전하는데 이때 셋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신경쓰지 않고 행동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방약무인입니다. 이는 원래 주변에 거리낌없는 당당한 행동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뒷날 의미가 바뀌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이렇듯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으나 당시 연나라에서 은거하던 전광이라는 사람은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아봤다고 합니다.그러나 시대는 형가를 가만히 두지 않는데 당시 이미 진나라를 제외한 6국 중 삼진이 멸망한 상태였고 조나라를 평정한 진나라는 제나라를 매수해 놓은 상태에서 초나라와의 결전을 앞두고 연나라를 먼저 손보려 시기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12.10
0
0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