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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사학은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선도사학은 선도적이고 진보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연구하거나 바라보는 학문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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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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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에서 남녀가 차별이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 이집트에서 남녀의 사회적 역할은 대체로 분리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여성은 사유재산을 가질수있엇고 무역상이 되기도 하며, 파라오가 되어 나라를 통치하기도 했습니다.또한 남녀 모두 장신구와 화장, 가발을 써 몸치장을 즐기기도 했으니 현대보다 차별이 없는 영역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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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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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제도는 언제부터 생겨난건지?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카스트제도는 아리아인이 인도에 침입한 이후 베다시대가 전개된 기원전 1300년 전후에 성립되었습니다.인도의 카스트제도의 기원은 사상이나 종교에 의해 발생했다는 설, 사회경제적 이유로 발생했다는 설로 나뉘며 바르나라는 분류는 힌두교문화와 함께 베다 시대에 생겨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힌두교에서 그러한 구분의 원래 목적은 사람을 계급순으로 나눈것이 아닌, 분업 즉 대대로 성직자, 무사, 관리 등의 일을 전문적으로 맡아 일하게끔 하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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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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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이먹고 난 잔반은 어떻게 처리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왕이 먹던 수라상의 잔반의 경우 궁내에 있는 내시와 궁녀들이 나눠먹기도 했습니다.또한 잔반을 내시와 궁녀들이 따로 몰래 빼내어 궁 밖에 내다파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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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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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공화정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로마 공화국은 고대 로마시대에서 기원전 510년경 왕정을 폐지 후 450여 년간 로마 정치를 이끈 공화정 정체와 그 정부를 말합니다.권력의 분리와 견제와 균형 원칙에 중점을 둔 복합적인 정치 체제로 오랜 세월 파트리키와 그 밖의 명문가 출신이 아닌 플레브스가 정치 투쟁을 벌이면서 공화국이 발전하게 됩니다.공화정 초기 로마는 왕정 시대 기원을 둔 귀족들이 통치,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이 정부를 장악할수있게끔 한 법이 철폐되었고 그 결과 신귀족이 등장합니다.공화정이 출범하고 처음 2세기 동안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에서 지중해 세계 전체로 영토를 넓히며 기원전 3세기 로마는 북아프리카, 이베리아반도, 그리스, 갈리아 남부까지 정복하게 되며 이후 2세기 동안 로마는 오리엔트의 상당한 지역과 갈리아까지 지배, 이 시점에서 공화정 체제는 제국주의로 변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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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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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위협하는 아홉 세력은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황룡사 9측 목탑에 있는 9세력은 일본, 당나라, 오월, 탐라, 백제, 말갈, 거란, 여진, 고구려 로 알려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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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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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Hard-boiled) 문체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하드보일드 분체는 미국 문학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문학이나 영화에서 주관적 감정을 배제하고 인물이나 사실을 냉정하게 묘사하거나 표현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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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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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 술에는 어떤 종류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전통주로는 소주, 막걸리, 동동주, 이화주, 모주, 감향주, 사절주,가향주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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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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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웅치전투가 벌어진 곳은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웅치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전투 중 하나로 전라도 웅치 방어선에서 벌인 전투 입니다.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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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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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이 일어난 배경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주도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라는 특성을 지녀 태평양전쟁 말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명이 주둔한 전략기지였고 8.15광복 직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6만여명의 제주민들이 일시에 귀환해 급격한 인구변동을 겪었습니다.귀환 한 사람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해 생계를 꾸리기 어려웠고,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으로 수백명의 인명 희생, 극심한 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로 인한 식량난 등이 겹쳐 민심이 악화,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경찰로 변신했고, 민생이 피폐한 상황에서도 군정관리들은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사회적 문제가 부각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발생, 제주 4.3사건의 도화선이 됩니다.1947년 3월 1일 3.1절 28주년을 맞아 좌파 진영의 제주 민전이 도내의 곳곳에서 기념집회를 주최,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기념식을 마친 군중을 시가 행진을 하며 가두시위에 돌입, 관덕정 앞 광장에서 구경하던 어린 아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에 차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기마경찰이 그대로 가려 하자 일부 군중들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갔고,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관덕정 쪽에서 총성이 나고 피투성이의 부상자들이 도립병원으로 업혀 들어오자, 부상당한 동료 경찰의 경호차 도립병원에 갔던 경찰 1명이 공포감을 못 이겨 소총을 난사해 행인 2명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합니다.당시 조직이 노출되어 수세에 몰려 있던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이를 계기로 3월 5일 3.1사건 대책 추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반경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게 됩니다.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1사건에 항의하는 민, 관 총파업에 돌입해 3월 13일까지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에 달하는 166개 기관 및 단체에서 파업에 동참하는 한편 미군정은 사태가 심각해지는 양상을 보이자 3월 8일 제임스 카스티어 대령이 이끄는 미군정청, 재조선미육군사령부 합동조사단을 파견해 진상조사에 나섰습니다. 당시 작성된 미군의 정보 보고서에는 3.10총파업에 좌우익이 공히 참가하고 있으며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으로 알려져있다고 기술, 미군정은 이렇듯 제주도민의 경찰에 대한 반감과 감정을 부추기는 남로당의 대중선동에 의해 3.10총파업이 증폭되었다고 분석했으나 그 대응책으로 경찰의 발포에 대한 과오를 추긍해 민심을 수습하기 보다 좌익세력 척결에 주력하는 정책을 전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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