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민의 자녀는 어릴때부터 집안일을 도왔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일반 평민들의 자제도 서당에 다닐수 있었습니다. 서당에서 수학한 학도가 7세부터 16세의 아동들이 중심이었고 보통 이 나이부터는 글공부도 하고 집안일도 도왔을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물론 남자 아이들이 주로 서당에서 학습을 했고 여자아이들은 집안에서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했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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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한반도의 지명보다 중국의 지명이 더 많다던데요? 그래서 중국의 역사를 기록한 거라는 음모설이 있다는데 신빙성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삼국사(三國史)라 하기도 하며,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金富軾) 등이 1145년(인종 23년) 완성한 삼국시대사(史)입니다. 대한 민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며, 삼국 시대의 각국의 흥망과 변천을 기술한 정사체의 역사서 입니다. 결론만 예기 하면 음모 입니다. 대륙설에서 가장 흔한 주장은 '지명'으로, 아주 조잡한 사례로는 '한강(漢江)의 한(漢)과 한수(漢水)의 한(漢)이 같은데, 한강은 개울물 수준으로 작으니 강(江)이라는 이름이 못 붙고 대륙에 있는 한수야 말로 강(江)의 이름이 어울리는 규모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역사서에 기록된 한양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서울이 아니라 중국의 산시성의 한중이며, 한양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한중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식의 주장인데 이들은 한반도에 있는 유사 지명들은 역사 왜곡을 위해 후대에 옮겨진 지명이라는 음모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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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과거 어느 시점부터 전쟁에서 '총'이라는 무기를 사용하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총을 처음 제조한 시기는 고려 말엽인 1377년(우왕 3)경으로, 최무선(崔茂宣)의 건의로 화약무기 연구와 제작을 맡은 화통도감(火熥都監)이 설립되면서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화약의 제조법은 최고의 비밀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화약기술자로부터 많은 어려움 끝에 중요한 기술을 배워 화약제조에도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조선 초기까지 최무선과 그의 아들 해산(海山)이 대를 이어 우리나라의 화약무기를 발전시켰으나, 중국의 총을 모방하여 만든 당시의 총은 성능이 좋지 못하였고 1447년(세종 29)에 이르러 세종의 지시에 의하여 대개혁을 이룩함으로써 우수하고 독창적인 우리 고유의 화약무기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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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를 외국에 최초로 전파시킨 인물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59년 처음 대한태권도협회가 만들어졌고, 1966년 국제태권도 연맹(ITF)이 만들어져 최홍희가 총재로 취임합니다. 1972년 최홍희가 정권과 갈등을 빚다 캐나다로 망명하며 ITF 본거지를 토론토로 옮기자, 대한태권도협회를 중심으로 새로 세계 태권도연맹(WTF)을 창립하여 태권도 보급에 나섭니다. 1973년에는 국기원이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ITF는 북미권에서 인지도를 얻다 1980년대 이후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 태권도를 중심적으로 보급하며, WTF와 함께 세계 태권도계를 양분하게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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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는 누구의 의해서 언제 만들어진 건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데칼코마니( décalcomanie)는 장식 기법 중 하나로, 도자기 혹은 기타 물건 등에 판화 혹은 미술 작품을 옮기는 것을 말한다.1750년 영국에서 최초로 발명되었으며, 프랑스에서 최초로 데칼코마니( décalcomanie)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데칼코마니아(decalcomania)라고 불립니다. 1936년 초현실 주의 화가 오스카 도밍게즈(Oscar Domínguez)가 종이 위에 구아슈(gouache) 기법으로 그림물감을 바르고 그것을 두 겹으로 접거나 다른 종이를 그 위에 겹쳐 압착했다가 떼어내는 방식으로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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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려장이라는 어이없는 풍습은 왜 있었던건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 부터 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 온 민족 입니다. 고려장이란 고려 시대에 늙고 병든 사람을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버렸다는 전설로 세간에 알려져 있으나, 어떤 고려 문헌에서도 실재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고 추측 건테 아마도 일제 강점기에 우리민족을 폄하 하려는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추측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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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 언어에도 한국어처럼 이상, 이하, 초과, 미만 등의 표현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물론 다른 언어 들에도 이상, 이하, 미만, 초과 라는 말이 존재 합니다. (영어,중국어, 둑일어순)1) 이상 -more than, 以上, mehr als2) 초과-exceeding , 超過, über-over 3) 이하- not more than , 以下, weniger als- less than 4) 미만-under , 不足, u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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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얼은 중인보다 대우받았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얼은 얼자에 비해서 양반인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족보에도 이름이 올랐으나 사회적으로는 중인으로 취급 받았습니다. 얼자는 아버지의 인정을 못받고 천인인 어머미의 신분에 따라 천인 취급을 받고 족보에도 읾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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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얼자는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얼(庶孼)은 주로 대부분의 조선시대의 양반의 후손 가운데 첩(妾)의 몸에서 나온 소생이라는 자손(서출 후손)을 뜻하며, 그와 동시에 양인(良人)이라는 신분에 속하는 첩이 낳은 서자(庶子)와 천민(賤民)에 속하는 첩이 낳은 얼자(孼子)를 모두 아울러 함께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서자는 양반인 아버지가 자녀라고 인지하여 정식으로 족보에 이름이 올랐을 때에는 법적으로 양반이었으나, 사회적으로는 중인의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인지를 받지 못한 서얼은 법적으로 어머니의 신분에 따랐는데, 특히 얼자는 인지를 받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고 합니다.(예. 홍길동) 다만, 얼자의 어머니가 면천(免賤)한 경우에는 얼자는 양인(良人)이 되었다고 합니다.(예. 성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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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가대표 축구단 이름이 왜 양지축구단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지(陽地)축구단이란 이름은 중앙정보부의 부훈인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에서의 양지를 따와 1967년 3월에 창단하여 1970년 까지 운영되었던 축구단을 말합니다. 양지 축구단은 청와대 다음 가는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의 주도로 창단된 만큼 국내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곳이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모든 면에서 북한을 주적으로 간주한 만큼 애국심을 강조하던 시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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