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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은 왜 공동 개최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래 2002년 월드컵 개최는 먼저 일본이 1988년주최 의사를 밝히고 먼저 조직위도 만들었습니다. 이에 질세라 우리나라도 1993년 월드컵 추진위를 꾸리고 경쟁에 달라 붙었지요. 그래도 일본이 당시의 경제력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한 입장 이였습니다. 브라질과 일본과의 관계도 좋았으니까요. 당시 브라질 펠레는 일본을 지지 하는 입장이였고 아르헨티나 마라도나는 한국을 지지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냥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사이가 안 좋아서 였다고 합니다. 그니까 한 마디로 브라질이 지지하는 일보니 괜히 이유 없이 미운 것이죠. 마침 이러한 이유로 다시 한국 주최 입장으로 분위기가 넘어오는 무렵 일본이 분위기를 눈치채고 먼저 공동 개최 입장을 제안 합니다. 자칫 그러지 않으면 개최 자체를 놓힐수 있다는 입장에서이죠. 마침 당시 피파 부회장이던 정몽준 회장도 이에 찬성하고 두 나라는 공동 개최를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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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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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알파벳은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알파벳의 기원은 그리스이며, 이 문자는 기원전 8세기에 페니키아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페니키아 문자는 22개 남짓한 글자들밖에 없어서 배우기 쉬웠고, 페니키아 상인들의 활발한 무역 활동에 의해 급속히 퍼져나가면서 여기저기서 쓰이게 되었다고 하지요. 페니 키아 문자에는 자음밖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 문자에서 그리스어에는 없는 자음들을 나타내는 글자들을 자신들의 모음을 나타내는 글자인 α(alpha), ε(epsilon), η(eta), ι(iota), ο(omicron)로 사용하게 되었고, 이로써 최초의 알파벳인 그리스 문자가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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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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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안된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친일파를 처단 하고자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지요. 광복 후 친일파를 청산하고자 김구 선생등은 노력 했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은 친일파를 비호하며 용서해 주는 것을 택했지요. 본인이 이 친일파 세력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고자 했던 욕심 때문 이였습니다. 그리고는 친일파 세력을 정부의 주요 관직에 앉혔습니다. 친일파인 사람들이 어떻게 친일파를 청산 할 수 있었을 까요.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격 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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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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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3년상을 했다고 하는데 왜 3년상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기가 걷지 못하고 뚜지 못하면서 엄마 품에서 자라는 기간이 2년 이라고 하지요. 3년째가 되야 비로소 아기는 걷던 , 뛰던 엄마 품에서 나가서 혼자 다닐 수가 있는 것이지요. 적어도 이 3년의 기간 즉 혼자서 몸을 가누기 조차 힘든 시간에 어머니의 돌보심을 생각하면서 부모의 상을 지내라는 뜻으로 만 2년 햇수로는 3년 째 상복을 벗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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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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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이혼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반이 이혼 하는 경우는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어려 웠습니다. 칠거 지악이라고 하는 악행을 저질러야 비로소 이혼이 가능 했다고 합니다. 다만, 평민들 사이에서는 비교적 이혼이 용이 했다고 합니다. 이혼 할때는 보통 일정의 돈과 함께 할급 휴서라고 해서 옷섬을 잘라서 주는 관례 가 있었다고 하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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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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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이 안댓으면???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단 명칭 부터 고쳐서 사용하겠습니다. 대동아 전쟁(大東亜戦争,다이토아센소 ,Greater East Asian War) 라는 말은 대 일본 및 아시아식민지국가연합과 미국 및 영국 등과의 전쟁이라는 용어로서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이 주로 썼던 용어 입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태평양 전쟁이라고 해야 겠지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이 만일 승리했더라도 유럽에서 독일이 패전을 하였기에 일본은 결국 무너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이 그나마 미국 등과 전쟁을 벌일 수 있던 배경에는 유럽은 독일이 막아 준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 이기 때문입니다. 독일도 이기고 일본도 이겼다면 그때는 아마도 독일과 일본 이 두나라가 전세계의 역사를 새로이 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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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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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에도 관직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0년 을사 늑약 으로 인해서 조선 혹은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완전히 없어져 버립니다. 대신 일본의 통치를 받는 굴욕스러운 일본의 식민지 역사가 들어서는 것이지요. 모든 일은 일본의 총독부 에서 관장 하게 되고 1925년까지 총독관방(總督官房)과 법무국(法務局), 내무국(內務局), 재무국(財務局), 식산국(殖産局), 학무국(學務局), 경무국(警務局)의 6국 체계가 갖추어졌으며 1932년 식산국에 속했던 농림, 축산 업무 등을 일괄 관장하는 농림국(農林局)이 신설되었다고 하지요. 더이상 조선 시대의 관직은 없었으며 모든 상부관직은 일본인이 맡거나 혹은 조선 총독이 내정하는 자가 되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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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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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50년 후 가장 국력이 강한 나라는 어느 나라일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돌고 도는 것 인가 봅니다. 많은 미래 학자 들이 2050년 경에는 중국과 한국이 세계 경제를 좌지 우지 할 것이라고 예측 하네여. 중국은 2050년 1인당 국민 총 생산량이 USD50,000로 한국USD100,000에 절반 밖에 미치지 못하지만 총 인구수를 같안 할때 세계 최대 강국은 중국이 될 것 이라는 판단 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경제 규모로는 미국을 제치고 제 2위에 오른다고 하구요. 특히 아시아 국가중 중국, 한국, 일본은 세계 10위 경제 대국에 포함된다고 하네여. 하지만.. 과연 그럴수 있을 것인지 솔직히 의심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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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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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곰방대의 길이에 따라 신분이 달랐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담뱃대는 담배를 담아 불태우는 담배통과 입에 물고 빠는 물부리, 그리고 담배통과 물부리 사이를 연결하는 설대로 구성되며, 설대가 긴 것을 장죽, 설대가 없거나 짧은 것을 곰방대라고 부릅니다.양반들은 평민과 구별 짓기 위하여 긴 담뱃대를 사용하였다고 하네여. 심지어 그들은 2~3m나 되는 담뱃대를 사용하고 하인이나 노비로 하여금 불을 붙이게 하였습니다. 그것으로 평민과 구별 짓도록 하였고, 긴 담뱃대를 재떨이에 딱딱 떠는 소리로 권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고 하지요.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울 경우 혼자서 담배통에 불을 붙이면서 물부리를 빠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불을 붙이는 하인이 딸리게 마련이었다. 즉 장죽으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은 양반층을 비롯한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계층에 국한되고, 일반 상민은 곰방대를 애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요 . 양반층 가운데서도 재산이 넉넉한 사람들은 백통이나 오동으로 담뱃대를 만들고 금이나 은으로 무늬를 넣어 치장한 장죽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나아가 양반들은 담뱃대뿐만 아니라 담배통을 은이나 금으로 치장하여 평민과 구별 짓고자 하였을 뿐 아니라 멋을 내고자 하였습니다.그리하여 담뱃대의 길이와 재질을 보면 그 소유자의 신분을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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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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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철거는 왜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총독부 청사 철거 논의는 6.25전쟁 중 서울 수복 이후에도 있었지만, 당시 우리나라이 경제사정이 대규모 건물을 해체할 여력이 없었기에 유야 무야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총독부 청사 철거는 1990년 경복궁 복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대통령 지시 사항으로 논의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1993년 8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은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해체하고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을 국책 사업으로 건립하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이에 1994년 조선 총독부 청사 철거 문제가 본격화되었지요. 치욕적인 역사를 씻어내자는 측에서의 완전 철거 주장과 뼈아픈 역사를 뒤풀이 하지 않기 위한 반면교사로서 역사적 증거로 보존하자는 논쟁이 일어났지요. ‘완전철거론’과 ‘현상보존론’, ‘이전복원론’ 등의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 한국 창조와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웠던 당시 정부는 조선 총독부 청사 철거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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