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서울이라는 지명이 어떻게 유래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서울이라는 지명은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도시를 정비해 나가는 과정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제일 먼저 궁과 성을 건축하였다.이때, 정도전과 무학은 종교적 사고와 유교적 바탕을 앞세워 서로 강한 주장을 펼쳤다. 두 사람의 이러한 태도는 성역(城役)을 정하는 일에서도 예외는없이 대립하였다. 현재 청와대 뒤 인왕산 북쪽에 선바위가 있는데, 이 선바위를 城안쪽으로 하자는 무학의 주장과 城밖으로 하자는 정도전의 주장은 매우 팽팽하여, 다른 도성은 다 쌓았는데 선바위 부근만 未完成으로 남았다 두 사람의 의견 대립으로 공사가 진척되지 않던 어느 날 아침,그날 따라 밤새 첫눈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한양 땅이 모두 하얀 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침 일찍 눈 구경을 하던 태조는 낙산 쪽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게도 城안쪽으로는 눈이 보이지 않고 바깥쪽에만 눈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태조는 얼른 별감들을 보내어 현장을 보고 오라 하였다 다녀온 별감들이 아뢰기를 성곽 밖으로만 눈이 쌓였고 안쪽은 맨땅이 드러나 있다고 하였다하도 기이한 일이라 잠시 멍하니 있던 태조는 하늘이 한양의 경계를 알려주려고 그러나 보다 여기며 별감들에게 다시 궁궐 뒤 인왕산 선바위 주변을 살펴보고 오라고 명하였다 바삐 다녀온 별감들의 대답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였다. 선바위를 중심으로 안쪽은 눈이 없고 바위를 포함한 바깥쪽은 눈이 쌓였다는 것이었다 태조는 기쁨에 사로잡혔다. 곧 정도전과 무학을 입궐케 하여 이사실을 말해 주었다. 듣고 있던 두 사람 또한 하늘의 뜻이라고 여기며 묵묵히 받아들였다 이로써 선바위 안쪽으로 성곽을 쌓게 되었는데, 이날 내린 눈이 성곽 안쪽과 바깥쪽의 경계를 뚜렷하게 제시해 주었다 하여, 눈과 울타리란 뜻으로 ”설울(雪鬱)“이라는 낱말이 생겼다 그때부터 ”설울“이란 지명을 쓰려 했으나 당시 이미 한성부라는 지명이 있었으므로, 계속 한성부 혹은 한양이라고 불리다가 1945년 해방 후 ”서울“이라는 세련된 地名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Q. 클래스 올덴버그라는 스웨덴 조각가가 표현한 작품들은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Oldenburg의 창작 과정은 매우 즉흥적이었고 종종 많은 실험을 수반했습니다. 그는 천, 폼, 플라스틱, 심지어 발견된 물건까지 다양한 재료를 작업에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회화, 소묘, 콜라주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Oldenburg는 또한 그의 작업에서 규모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종종 멀리서 볼 수 있도록 설계된 대규모 조각품과 설치물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시각적으로 놀랍고 개념적으로 복잡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Oldenburg의 첫 번째 주요 작품은 그가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만든 일련의 부드러운 조각품이었습니다. 이 조각품들은 천, 폼, 플라스틱과 같은 부드러운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음식, 도구, 가구와 같은 일상적인 물건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올덴부르크의 부드러운 조각은 당시의 전통적인 조각에서 급진적으로 출발하여 예술계에서 빠르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는 대형 조각물을 비롯해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대표작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1.'Giant Hamburger' (1965) - 이 작품은 거대한 햄버거를 형상화한 것으로, 소비 문화와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예술작품 중 하나입니다. 2.'Floor Burger' (1962) - 이 작품은 바닥에 놓인 거대한 햄버거를 형상화한 것으로, 'Giant Hamburger'와 마찬가지로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작품입니다. 3.'Typewriter Eraser' (1977) - 이 작품은 거대한 타이핑기 지우개를 형상화한 것으로,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물건을 대상으로 한 올덴버그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4.'Soft Toilet' (1966) - 이 작품은 부드러운 직물로 만든 화장실을 형상화한 것으로, 소비문화의 대상을 대상으로 한 올덴버그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5.'Clothespin' (1976) - 이 작품은 거대한 옷집게를 형상화한 것으로,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물건을 대상으로 한 올덴버그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Claes Oldenburg의 예술적 유산은 혁신과 실험 중 하나입니다. 그의 작업은 예술을 보고 경험하는 방식을 재정의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순수 예술과 대중문화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여전히 볼 수 있으며 그의 유산은 계속해서 미래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줄 것입니다.
Q. 예술치료의 효과는 어느정도일까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술 치료(영어: arts therapy)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과 현대 의학, 심리 치료 이론, 상담 이론이 통합된 다각적인 치료기법이다. 창조적인 예술 활동을 통해 내담자의 감정이나 내면세계를 자발적으로 표현하게 하고, 사고나 감정, 행동의 제한점을 개선 및 유지시키는 것에 활용되고 있다.예술 치료는 예술의 장르가 다양하고 치료의 개념이 치유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어 다양한 유형으로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미국 미술치료협회(영어: American Art Therapy Association)는 예술 치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미술 치료(영어: Art therapy)란 전문적 관계 내에서 병, 트라우마 또는 삶에서의 도전들에 직면한 사람들이나 개인적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예술 작업이 치료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말한다.[1]캐나다 음악치료협회(영어: Canadian Association for Music Therapy)의 음악 치료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음악치료(영어: Music therapy)란 개인의 신체적, 심리적, 정서적 통합을 돕고 병과 결함을 치료하는데 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2]공통적으로 예술치료는 정신질환, 자폐증 등 구체적인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 외에도 일반인 각자의 인격 성장과 발전, 자아 통찰력의 증진 등 자아성찰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Q. 신숭겸 장군의 성장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숭겸의 활솜씨가 뛰어났는지 함께 황해도 평산으로 사냥을 나간 왕건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가리키며 "저 기러기 떼 중 앞에서 세 번째로 가는 기러기를 맞춰 보라."라고 명하자 화살을 쏴서 기러기를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는데 이 이야기가 평산 신씨의 본관이 평산이 되는 유래이다.신숭겸 이전에는 성씨가 없었고 출신은 미천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신라 중앙의 왕족, 귀족층이나 장보고처럼 중국물 먹은 사람이 아니면 지방 명문가 출신들도 성씨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비록 후백제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찬이었던 능환조차 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3] 그 외에도 정2품 대광이었던 만세나 매곡성주 공직 등 고위층이나 유력가이면서도 성씨가 전해지지 않는 사례는 많다. 고려사 태조 시기를 살펴보면 성씨가 없는 관료나 호족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데 동일 시기에 성씨가 전해지는 박지윤, 유천궁 같은 유력 호족들 역시 당대에 자칭하고 세보를 꾸몄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수많은 성씨들의 시조가 후삼국시대 호족이다.고려 개국에 기여한 무장들 중에서는 일찍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왕건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했던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참패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신숭겸은 한고제 유방을 살리기 위해 미끼가 되어 죽은 기신을 본따 자신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을 빌려 입고 미끼가 되어 후백제군을 유인했으며, 왕건은 일반 군졸의 옷을 입고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왕건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이 왕건인줄 알고 쫓았고 결국 신숭겸은 전사했으며 함께 유인 작전에 나선 김락, 김철, 전이갑·전의갑 형제와 그 사촌동생인 전락, 개국공신 평장사 호원보, 대상 손행을 포함한 8명의 장수가 전사했다. 이 때 4명을 포함하여 모두 8명의 장수가 전사하였다 하여 공산의 이름이 팔공산이 되었다 한다.훗날 참수된 신숭겸의 시신은 왼쪽 발 밑에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겨우 찾았지만 머리는 끝내 찾지 못해서 왕건은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고, 미리 정해둔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에 매장해주었다. 신숭겸의 무덤은 봉분이 3개인데 머리를 대신한 황금 두상을 지키고자 이렇게 했다고 전한다. 이 묘자리는 풍수지리가들이 명당 중에 명당이라고 극찬하기도 한다. 가보면 석물 같은 게 없을 뿐이지 영락없는 왕릉의 모양새를 하고 있으며 맑은 날씨에 묘로 올라가보면 춘천시내가 훤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