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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동연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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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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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게 된 사건과 그 과정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전두환은 쿠데타를 일으킨 후 국가의 실권을 차지하고, 최규하 대통령 하야 이후 유신헌법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체육관 선거(간접선거)로 1980년 11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투표 없이 당선된 건 아니고 투표를 하긴 했는데, 국민의 직접 선거가 아니라 형식적 선거였습니다.그 후 유신헌법을 개헌해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고, 새 헌법에 따라 다시 대통령선거를 치루어 1981년 7년 임기로 12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이때도 국민의 직접 선거가 아니라 체육관 간접 선거였고, 단지 선거인단 이름만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아니었을 뿐입니다.전두환은 1980~1987년까지 8년 집권합니다. 원래는 간선제를 바탕으로 퇴임 후에도 계속 자신의 허수아비를 세워 영향력을 행사할 계획이었는데, 국민들이 대통령 간선제 유지하겠다는 호헌조치에 반대하며 6월 민주항쟁을 일으키자 이에 굴복하여 현행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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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성경책에 비트코인이 예언되어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성경은 예언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비트코인의 ㅂ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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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귀류법歸謬法에 대해 간단하게 해설해주실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귀류법은 가정문의 명제를 증명할때 사용됩니다​가정문은 가정과 결론으로 구성돼있습니다​가정 결론이참 참참 거짓거짓 참거짓 거짓일 수있는데​가정 결론이참 거짓일때 가정문이 거짓이고 나머지 경우에 가정문은 참입니다​우리는 가정문을 증명을 하고 싶은겁니다그러니까 가정문이 거짓이되는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즉​가정이 참이고 결론이 거짓인 상황이 없다는걸 보여야합니다​가정이 참이고 결론이 거짓인걸 다뤄야하기때문에 가지고 있는 결론을 부정합니다​그런 후에 모순을 찾아서 그러한 상황이 존재하면 모순이 생기므로 그러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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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에 병인박해가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러시아의 남하정책이 원인제공입니다.카톨릭 교도들이 대원군에게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조선, 프랑스, 영국 동맹을 맺을 것을 권했고프랑스 선교사를 만나도록 했으나 (속셈은 3국동맹을 통해 포교의 자유를 누리려고)선교사들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기가 늦었습니다.이로 인해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정부에서는 카톨릭 탄압을 주장해서 병인박해가 일어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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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약산 김원봉은 좌익과 우익 어느쪽 진영의 사람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명목상으로는 중도파를 아우른다 하였으나 실상은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이자, 진보적 민족주의 단체인 인민공화당의 위원장이었던 김원봉은 미군정 하에서 더이상의 활동이 어려워졌다. 김원봉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공동의장이었던 박헌영, 백남운, 허헌은 1947년 말에 모두 월북했다. 하지만 김원봉은 남한에 더 머물렀다.당시 극심한 좌우 대립으로 혼란하던 서울에서 사회주의 핵심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던 김원봉은 다른 거물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공공연한 협박에 백색테러 위협을 받기도 했다. 남한에서 점차 공개적인 활동이 어려워지자 김원봉은 중국에서 그랬던처럼 거처를 수시로 옮기고 잠행을 했다. 강준만에 의하면 한곳에 2시간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고 한다.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김원봉과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한국 내 좌익 세력의 최대 거물이었던 김원봉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그러나 민전이 와해되면서 김원봉의 권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김원봉은 사마로(司馬路)[39]에게 월북 이전에 보낸 편지에서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쪽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고 쓰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월북을 결심한다. 북조선민전은 1948년 3월 25일에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서한을 김원봉 을 포함한 김구, 김규식, 홍명희, 백남운, 박헌영, 허헌, 김창준 등에게 발송 하였다. 남조선민전 등에서도 남북협상 실현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김원봉도 조선인민공화당을 대표하여 남북협상 회의에 참가하겠다고 연락원 을 통해 답신을 보냈다. 남조선민전 발표에 따르면 조선인민공화당은 김원봉 외 7명이 1948년 4월 9일에 새로운 정치무대 평양으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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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대표적인 발명품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측우기비가 내린 양을 재는 기구. 조선 세종 23년(1441년)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했고, 그 뒤 개량에 힘써 세종 24년(1442년)에 측우기라고 이름하였다. 이 측우기는 무쇠를 써서 깊이 42.5cm, 지름 17cm의 둥근 통 모양으로 만든 것인데, 천문 관계 일을 맡아보던 관상감에 대를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아 비가 그친 다음에 그 둥근통에 담긴 빗물의 깊이를 재었다. 이 측우기는 이탈리아의 카스텔리가 만든 측우기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우리 나라의 자연 조건을 통계적으로 파악하여 농업 생산에 이용하는 한편, 자연 재해를 이겨내려고 애쓴 조선시대 과학자들의 노력의 결실이다.2.규표규표는 일년의 길이가 정확히 몇날인가와 24절기를 알아내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이다. 수직으로 세운 막대 표의 그림자 길이를 기준으로 동지, 하지, 춘분, 추분이라하고 나머지 20개 절기를 그 사이에 약 15일 간격으로 배열한 것이다.3. 간의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천체 관측 기구이다. 1276년 중국 원나라때 처음 만들어졌으며, 세종 때 원나라의 제도를 본떠 이천, 장영실 등이 대·소 간의를 만들었다.1437년(세종 19년) 오늘날의 천문관측기기와 같은 원리로 개량된 천문기기인데, 행성과 별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대간의는 간의대에 설치했고, 소간의는 대간의를 작게 하여 갖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오늘날 각도기와 비슷하며, 혼천의를 간소화한 것이다. 임진, 정유왜란으로 유실된 후 최초로 복원되었다.4.자격루자격루는 세종 16년(1434년)에 장영실 등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만든 일종의 자동 물시계이다.나무로 만들었는데, 자동 시보 장치는 지렛대의 원리와 경사면을 굴러 떨어지는 공의 운동을 연결한 것으로 2년이나 걸려 완성하였다.이 자격루는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에 설치되어 조선 왕조의 표준 시계로 쓰이다가 자동 장치가 고장나 고칠 수 없게 되자, 단종 3년(1455년)에 자동 시보 장치의 사용이 중지되었다. 연산군 때에는 자격루를 창경궁으로 옮겼으며, 자격루가 만들어진 지 100여 년 만인 중종 31년(1536년)에 새로운 자격루가 만들어졌다. 이 자격루는 현재 덕수궁에 간직되어 있으며 1985년에 국보 제229호로 지정되었다.5.양부일구해시계의 한 가지. 세종 19년(1437년)에 정초, 장영실 등의 과학자들이 많은 기술자를 지도하여 만든 것으로, 솥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다.오석(검은 색깔의 광택이 있는 돌)에 반지름 30cm의 반구를 파고, 그 안에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 절기를 새겨 수직으로 시각의 선을 그렸다. 여기에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이 꽂혀 있어 햇빛이 바늘에 닿으면 그 그늘이 오목한 부분에 나타나므로 그 위치로써 시각을 헤아렸다.세종이 그 해시계를 백성을 위한 공중 시계로 삼기 위하여 혜정교(지금의 종로1가)와 종묘 남가(지금의 종로3가)에 설치함으로써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 시계가 되었다6.혼천의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의 구실을 하였던 기구로서 둥근 하늘의 모형을 하고 있다.혼의, 또는 옥형이라고도 한다. 하늘의 적도· 황도· 자오선 등에 해당되는 여러 개의 둥근 테를 구형으로 짜맞춘 것으로, 기원전 2세기경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우리 나라에서는 1433년(세종 15년)에 이천· 장영실 등이 감독하여 처음 만든 뒤로 천문역법의 표준 시계와 같은 구실을 하게 되어, 물이나 추를 동력으로 한 시계 장치를 갖춘 정교한 작품도 만들어졌다. 7. 거중기정약용이 고안한 기계로 1796년 수원성곽을 쌓는데 이용되었다.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장치이다. 정약용은 정조가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奇器圖說)》이란 책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개발하였다.위에 네 개 아래에 네 개의 도르래를 연결하고 아래 도르래 및으로 물체를 달아매고, 뒤 도르래의 양쪽으로 잡아당길 수 있는 끈을 연결하여 이 끈을 물레에 감아 물레를 돌림에 따라 도르래에 연결된 끈을 통해 물체가 위로 들어올려지도록 했다.《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완전히 조립된 모습의 전체 그림과 각 부분을 분해한 그림이 실려있다. 이 책에는 수원성(화성) 공사를 위해 제작한 기구의 종류, 수량이 나와있는데, 거중기는 1대가 사용되었으며 왕실에서 직접 제작하여 공사현장에 내려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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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장인 문화가 발달한 이탈리아의 역사적 배경은 무었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탈리아에서 일반적으로 로마는 문화의 수도, 피렌체를 경제의 수도, 밀라노를 산업의 수도라 부른다. 북쪽에 밀라노, 토리노, 베로나등을 중심으로 자동차, 중-경기계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공업 국가로써 세계 제 5위이다. 이탈리아 내에서 3대 항구라 하면 베니스, 제노바, 나폴리 항을 들 수 있고 이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조선 중.화학 공업이 발달했다. 이탈리아가 섬유제품이나 가죽이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는 것은 오랜 전통과 기술이 발달 그리고 장인 정신 때문이라도 볼 수 있다. (고대 로마 제국 시대부터 사람들이 실크와 옷을 입었다는 걸로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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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가위바위보는 어느 나라에서 시작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하는 놀이를 `가위바위보`라 하는데 이 이름이 생기기 전에는 `짱껨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었다. 이 `짱껨뽀`는 본래 중국말 `란쩡펑`에서 나온 것으로 란쩡펑이란 발음이 와전되어 `짱껨뽀`가 된 것이다.​중국에서 들어온 이 놀이는 중국말을 그대로 따서 `짱껨뽀`라 했는데, 윤석중 선생이 순수한 우리말로 된 `가위바위보`란 이름을 지어냈다. 그 덕에 `짱껨뽀`란 말은 지금 중장년층의 기억 속에나 있는 말이 되었고, 그 자리를 `가위바위보`가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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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제사를 언제부터 왜 지내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자연 현상과 천재지변의 발생을 경이와 공포의 눈으로 보았으며 4계절의 운행에 따른 조화로 인간이 생존할 수 있음을 감사하였다. 동시에 하늘과 땅, 해와 달, 성신(星辰)을 비롯하여 산천(山川)에 깃들여 있다고 생각한 신(神) 그리고 선조(先祖)와 선사(先師)의 가호로 재앙이 없는 안락한 생활을 기원하였는데, 이것이 제사의 기원이다.그러나 제사는 인문(人文)의 발달에 따라 대부분의 제사 대상이 의미를 잃게 되었고, 오늘날 제사라고 하면 선조에 대한 의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느끼게 되었으며 지내는 절차도 일정한 격식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제례이다.문헌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이미 요(堯), 순(舜) 시대에 천신(天神), 지기(地祇), 5악(嶽), 4독(瀆)을 제사한 기록이 있고, 조상숭배가 크게 성행하여 조상에 대한 제례가 하(夏), 은(殷) 시대를 거쳐 주대(周代)에 확고하게 갖추어졌다.우리나라 제사의 시초로는 부여(夫餘)에서 12월에 하늘에 제사한 영고(迎鼓), 고구려에서 하늘에 제사 지낸 동맹(東盟), 동예(東濊)에서 10월에 하늘에 제사 지낸 무천(舞天) 등을 들 수 있다. 또 마한(馬韓)에는 소도(蘇塗)라는 신역(神域)이 있어 솟대를 세우고 북과 방울을 달아 천군(天君)이 신을 제사 지냈고, 신라에서는 남해왕(南解王) 때에 혁거세묘(赫居世廟)를 세우고 혜공왕(惠恭王) 때에 5묘(廟)의 제도를 정했으며 산천도 제사 지냈다.고려시대에는 원구(窩丘), 방택(方澤), 사직(社稷), 종묘(宗廟), 능침(陵寢), 선농단(先農壇), 선잠단(先蠶壇), 문선왕묘(文宣王廟), 마조단(馬祖壇), 사한단(司寒壇) 등을 설치하고 예를 갖추어 제사 지냈고 명산, 대천, 우사(雨師), 운사(雲師), 뇌사(雷師) 등도 제사 지냈다. 조선시대에도 원구와 방택만을 제외하고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오늘날에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종약원(宗約院)이 거행하는 종묘의 제향, 서울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서 유림(儒林)이 거행하는 문묘(文廟)의 제향, 유림이 거행하는 각 서원의 제향, 사가의 조상 제사 이외의 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다.사가(私家)의 제례는 고려시대에는 대부(大夫) 이상은 증조까지 3대, 6품(品) 이상의 벼슬아치는 할아버지까지 2대, 7품 이하의 벼슬아치와 평민은 부모만을 가묘(家廟)를 세워 제사 지내게 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근거를 두어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고조까지 4대를 봉사(奉祀)하게 했다.근래에는 1969년 제정된 가정의례준칙으로 기제는 조부모까지만 봉사한다고 하였으나 1999년 규제개혁철폐에 의하여 가정의례준칙은 폐지되고, 새로 제정된 건전가정의례준칙을 보면 제례는 기제 및 명절차례로 구분되고 봉사는 제주로부터 2대조까지 성묘는 제수를 마련하지 아니하거나 간소하게 한다고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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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칠지도라는 칼이 살상용 무기였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특유의 복잡한 형상 덕분에 한 눈에 봐도 전투용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있는 보배임을 알 수 있다. 칼자루에서부터 칼날에 이르기까지 형상은 나무 모양인데 이것은 신성한 나무로, 제사의 주관자를 상징한다. 또한 7갈래 가지는 북두칠성을 본 뜬 것으로 한 나라의 화복을 다스리는 군주의 통치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말 그대로 제사와 통치를 모두 주관하는 군주의 증표이자 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각 나라 군주들 사이에서는 정교하게 제작한 보검을 선물로 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대체적으로 대국의 통치자가 그보다 작은 나라에 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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