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노인과 바다는 왜 유명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하나의 거대한 어류와 어부인 노인의 긴 싸움을 담고 있습니다. 싸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 싸움, 귀환길의 총 3파트로 나눠서 볼 수 있는데 청새치를 잡기 위해 노인은 몇 날을 낚싯줄을 잡고 버팁니다. 또한, 얻었다가 잃어버리는 인갈들의 인생사와 또 다시 잃어버린 물고기 대신 다른 물고기를 잡으러 노인은 바다로 나갈겁니다. 내일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인간의 존엄성이 빛을 더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책의 내용을 보면.... 산티아고 노인은 84일간 아무것도 낚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84일 만에 큰 물고기인 청새치를 잡았지만 뜻밖에도 상어를 만나 상어들에게 여러 번 공격을 받습니다. 작살과 칼, 노, 몽둥이를 사용해가며 상어를 무찌르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거듭된 공격에 청새치의 대부분을 빼앗기게 됩니다. 여기에서 상어는 인간들에게 닥치는 시련과 고난, 난관, 운명 등을 의미합니다. 이는 작자인 헤밍웨이가 산티아고 노인을 통해 어떠한 고난과 역경 그리고 시련이 올지라도 굴복하지 않고 나아간다는 이야기를 전달해 줍니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인간은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말처럼 '인간은 어떠한 난관에 봉착해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인간은 투쟁을 통해, 승리를 위해 고난을 견디는 인간 영혼의 능력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는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arnest Hemingway, 1899~1961)가 1952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죠... 이 작품으로 헤밍웨이는 퓰리처상(1953년)과 노벨문학상(1954년)을 수상했습니다. 헤밍웨이가 53세에 쓴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는 그가 쿠바의 아바나 근교에 머물면서 바다낚시로 소일하던 시절, 실제로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면서 얻은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입니다. 요약하면... 허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황폐하고 불모지 같은 현실에서 올바른 삶의 방향에 대한 탐구와 패배를 모르는 한 노인의 삶을 독백체로 표현'하였으며 운명의 험난함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를 소설로 표현하였습니다.
Q. 오스만 튀르크는 어떤 역사를 갖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 아프리카 두 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이다.1299년 아나톨리아 내륙의 오스만 가지(عثمان غازى, Osmān Gāzi)라는 베이(Bey, 부족장)가 다스리던 작은 나라에서 시작하였으며, 정복전쟁을 통해 룸 셀주크 멸망 이후 난립했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며 성장, 아나톨리아 일대를 장악하였다. 마침내 1453년에는 건국 이래 2,200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을 정복하며 교통과 무역의 요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 수도로 삼고 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북으로는 러시아와 폴란드, 서로는 오스트리아와 모로코, 남으로는 에티오피아, 동으로는 이란과 접하는, 전 세계적 영향력을 미치는 강력한 패권국가가 되었다.후대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은 보수적 성격으로 인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읽지 못한데다가 무능한 술탄들이 연이어 배출되고 근위대인 예니체리의 전횡이 심해지면서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특히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전파가 늦어진 탓에 영토를 하나하나 잃으며 위세가 수축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동맹국의 일원이 되는 악수를 두고 협상국에 패배하였다.[24] 이후, 내부 소수민족 대다수가 독립하고, 그리스에게 국가의 발상지인 아나톨리아의 해안가까지 점령당하며 강대국들의 뜻에 의해 갈라지었다. 튀르크 전체가 열강들의 식민지로 전락할 뻔했으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지휘 아래 기사회생하여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튀르크족의 국민 국가, 튀르키예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25] 1922년 11월 1일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제국의 종교는 이슬람이었지만, 밀레트 제도에 의해 다른 종교 및 그들의 종교법 또한 존중했기에, 이슬람을 국교라 하기에는 애매하다. 실제로, 제국헌법에서 이슬람을 국교로 명시한 시기는 압뒬하미트 2세 시절에 미트하트 파샤가 주도한 '1876년 헌법'(1876 kanun-ı esasi)이 처음으로 제국의 존속기간(1299~1922)을 따져보면 623년 역사 중 겨우 46년이다.
Q. 공민왕은 어떤 인물이었를까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제31대 왕(1330~ 1374). 재위 기간은 1351~1374년. 왕위에 오른 뒤 중국 원나라를 배척하고 친원파인 기씨(奇氏) 일족을 제거하였고, 쌍성총관부를 폐지하였으며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였습니다고려의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충혜왕의 동생입니다. 11살 때 원나라에 가서 교육을 받고, 원나라의 노국 대장 공주와 결혼한 후 22살에 고려에 돌아와 왕이 되었습니다. 공민왕은 고려로 돌아온 후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민왕은 반원 자주 개혁을 시작했다. 먼저 친원파의 우두머리인 기철을 제거했다.( 기철은 원나라에 공녀로 간 여동생이 아유시리다라이라는 아들을 낳고 원황후가 된 것을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리며 악행을 일삼던 인물이었다). 공민왕은 기철이 강제로 빼앗은 넓은 땅과 많은 재산, 노비들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변발1)과 호복2) 등 몽골식 생활 풍습을 금지하고, 정동행성을 없앴어. 그리고 쌍성총관부3)를 공격해서 원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철령4) 이북의 땅을 99년 만에 되찾았습니다몽골에 보내던 공녀와 환관도 더 이상 보내지 않았고. 또한 원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각종 시호와 제도들을 다시 고쳤습니다. 즉 ‘충’자가 들어가는 왕의 시호를 바꾸었는데, 충렬왕은 ‘경효’, 충선왕은 ‘선효’, 충목왕은 ‘현효’라고 다시 지었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