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홈답변 활동잉크

안녕하세요 김동연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전문가입니다.

김동연 전문가
보가9 그래픽 디자인 및 영상 편집 총괄
음악
음악 이미지
Q.  사람이 먹히는자 이면 먹는자는 누군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존재하는 모든 육식동물에 해당한다고 보면 됩니다.사자 호랑이 상어 악어 뿐 아니라 고릴라 원숭이 여우 들개 도 포함된다는거죠
역사
역사 이미지
Q.  축구때문에 일어난 전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축구전쟁"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유혈사태로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축구전쟁이 압권입니다.멕시코월드컵 북중미 최종예선에서 맞붙은 두 나라가 격전을 치르다가 2100여명이 전사하는 실제 전쟁까지 벌였다는 사실입니다.하지만 실제 역사는 조금 다른데, 축구 때문에 충돌이 빚어진 것은 사실입니다.1969년 6월 15일 2차전에 원정 응원을 온, 온두라스인들이 홈 관중에게 몰매를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온두라스에선 엘살바도르인을 겨냥한 방화와 집단폭행으로 희생자가 속출하자 엘살바도르는 세계인권위원회에 온두라스를 고발했고, 온두라스는 엘살바도르 상품 수입금지로 대응하였으며, 6월 23일 두 나라는 국교를 끊었고, 나흘뒤 멕시코에서 열린 플레이오프에서 엘살바도르가 이겼으며, 급기야 7월 14일 엘살바도르의 전격적인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당시 온두라스에는 국경을 넘어온 30만명 가량의 엘살바도르인이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온두라스는 1969년 농지개혁을 하면서 엘살바도르 이민자들 제외했으며, 수만명을 추방하는 등 양국의 국민감정은 축구 이전부터 이미 악화돼 전쟁의 불씨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축구전쟁은 홍보전의 산물로,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가 축구에서 지자 소요사태를 벌여 전쟁을 시작했다"는 주장을 조직적으로 유포했고, 온두라스는 "한 엘살바도르 녀석이 온두라스 여인을 향해 오줌을 눈 것이 모든 사태를 촉발했다"고 맞받았지만 뒤집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사후세계와 관련된 궁금증 질문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독교:사랑스럽고 전능하신 우주의 창조주로서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동정녀에게서 태어나 기적을 행하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 것입니다.삼위일체의 제3위이시며 영적 생명과 인도의 근원이신 성령에 대한 믿음.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이며 믿음과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 궁극적인 권위라는 믿음.예수님의 부활과 그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카톨릭교:베드로의 후계자이자 가시적 교회의 머리인 교황의 권위에 대한 믿음.은총과 영적 자양분의 수단으로서 성례전, 특히 성찬례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은총의 상태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정화되는 곳인 연옥의 존재에 대한 믿음.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고 믿는 성도들의 중보에 대한 믿음.원죄 없이 잉태되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원죄로부터 보호받았다는 교리를 믿습니다.​불교:괴로움은 삶의 고유한 부분이며, 괴로움은 갈애와 집착에서 발생하고,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으며,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팔정도라고 가르치는 사성제에 대한 믿음.바른 이해, 바른 의도,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으로 구성된 팔정도에 대한 믿음.업보의 법칙에 대한 믿음은 행위에는 결과가 따르며 이번 생에서 한 행위의 결과가 미래 생에서 그 존재의 본질을 결정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깨달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또는 진정한 이해의 실현과 고통의 끝.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과 자애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이슬람교:Tawhid: 신의 유일성과 신성의 절대적인 단일성에 대한 믿음.천사(Angels):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영적 존재인 천사의 존재에 대한 믿음.선지자: 인류에게 그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한 선지자의 존재에 대한 믿음.꾸란: 꾸란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심판의 날(Judgment Day): 모든 사람이 이생에서 자신의 행동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심판의 날에 대한 믿음.사후세계(The afterlife):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신자는 신앙과 선행에 대한 보상을 받고 불신자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힌두교:브라만(Brahman): 궁극적인 실재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인 브라만(Brahman)으로 알려진 최고의 존재에 대한 믿음.아트만(Atman): 개인의 영혼 또는 아트만의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우주적 영혼 또는 브라만의 일부로 여겨집니다.카르마(Karma): 이 생에서 한 개인의 행동이 내세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는 믿음.환생(reincarnation): 죽은 후에 영혼이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환생의 순환에 대한 믿음.카스트 제도: 개인의 출생에 따른 사회적 위계에 대한 믿음으로 각 사람은 카스트에 따라 사회에서 특정 위치를 차지합니다.요가: 영적 깨달음과 신과의 합일을 달성하기 위해 요가 및 기타 영적 수련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
역사
역사 이미지
Q.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은 우리 역사에 어떤 역사적 의의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실학의 발달​사회의 폐단이 심각해지고 농민의 몰락이 심해지는 가운데,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고 민족 문화를 바로 이해하려는 새로운 학문 활동으로 실학 운동이 일어났다.실학은 이론에만 치우치던 성리학과는 달리,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풍이었다. 18세기에는 많은 실학자들이 활발하게 학문 활동을 펴 자랑할 만한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한편 이 무렵, 서양 문물의 도입과 함께 이를 연구하려는 학자들이 생기게 되어, 조선 사회에는 문화의 새로운 기운이 감돌게 되었다.​1. 실학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2. 실학 사상의 성격은 무엇이며, 실학자들의 주장은 어떠하였는가?3. 실학자들의 국학 연구 활동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4. 서양 문물의 도입과 서학의 연구는 조선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학문의 새 경향조선 전기의 학문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성리학은 이황, 이이의 연구 활동에 의하여, 조선 성리학으로서 독특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당시의 학자들은 벼슬을 하면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학자들은 성리학에 열중한 나머지, 성리학만이 옳고, 그 밖의 다른 학문은 모두 그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불교는 물론, 같은 유학의 계통이지만 그 흐름이 다른 양명학마저도 배척하였다. 또, 기술학도 천한 것으로 여겼다.이러한 성리학은, 자유로운 학문 활동을 억눌렀을 뿐 아니라,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해 나가는 데도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일부의 학자들은 이론에만 치우치는 성리학을 비판하고, 나라와 백성의 살림을 부강하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실용적인 학문, 즉 실학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 속에서 실학 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서양의 학문과 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려는 서학도 나타났다.​실학의 성장​실학은 자유로운 비판 정신을 터전으로 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그 성과를 실생활에 활용하며, 실증적인 연구 방법을 내세운 학문이었다.실학의 선구자는 이수광, 한백겸, 김육 등이었다. 이수광은 세 차례나 사신으로 명에 왕래하면서 세상을 넓게 보고, 지봉유설이라는 책을 지어 박학의 기풍을 나타내었다. 같은 시대의 한백겸은 역사, 지리를 고증해 가면서 실증적 학풍을 보여 주었다. 한편, 김육은 서양의 역법에 기초하여 만든 중국의 시헌력을 들여 와 사용하게 하는 한편, 대동법의 확대 실시와 동전의 유통, 보급에 힘썼다시헌력실학은 효종, 현종 때의 학자인 유형원에 이르러 그 폭이 더욱 넓어졌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고 농촌에서 일생 동안을 학문에 힘썼으며, 반계수록이라는 책을 지었다. 그는 이 책에서 전제, 관제, 병제 등 농촌 사회와 민생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제도에 대하여 논하고, 그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였다.그 후, 숙종, 영조 때의 학자 이익은, 당시 사회의 그릇된 점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개혁의 방법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생을 학문에 힘써 백과 사전류의 저술인 성호사설을 지었고, 안정복 등과 같은 많은 제자를 키워 냈다.이익의 성호사설실학 운동의 전성실학의 전성기는 영⋅정조 때였다. 이 무렵, 실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은 청의 고증학이나 청을 통해 들어온 서학에까지 미쳤다. 그리하여 실학자들은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학문적 성과를 남겼다.실학자들은 양반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모순을 비판하였으며, 실생활에 이용되고, 국민 생활을 넉넉하게 하기 위한 학문 연구에 힘썼다. 이들 실학자들은 먼저 농촌 문제에 학문적 관심을 기울였다.일찍이 유형원, 이익 등은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농업을 보다 중시하고,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정약용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한편, 또 다른 실학자들은 농업과 더불어 상공업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들은 청에서 선진 문명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여 북학파라고도 불렀다. 북학파 학자 중에는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이 유명하였다.박제가의 북학의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는 정약용이었다. 그의 학문 활동은 정치, 경제, 사회에서부터 과학, 의학, 종교, 경학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을 만큼 다양하였다. 그의 학문은 500여 권이나 되는 많은 저술에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도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이 유명하다.정약용의 목민심서한편, 실학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 나라의 역사, 지리, 언어 등에 대한 국학 연구 활동도 활발해졌다.역사 연구에는 안정복, 한치윤, 이긍익 등이, 지리 연구에는 이중환과 정약용 등이 뛰어났다. 한편, 지도 제작에서는 대동여지도 등을 만든 김정호의 업적이 높이 평가된다. 그리고 금석학에는 김정희, 어문 연구에는 신경준과 유희, 농학에는 서유구, 어류 연구에는 정약전 등의 활동이 컸다.유희의 언문지실학의 의의이와 같이, 실학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관심이나 연구 분야, 그리고 개혁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다르게 나타났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학문 활동이 실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점에서는 생각이 같았다.따라서, 이러한 생각 아래 학문에 힘쓰고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으나, 그들의 학문은 아직 성리학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끼치기에는 어려운 처지의 관료이거나, 일생을 학문에만 힘써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과 주장이 국가 정책에 반영되기는 어려웠다.이러한 실학 사상은 정약용 이후 이규경, 최한기 등에 이어졌고, 그 후에 개화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최한기의 명남루총서서양 문물의 전래선조 말부터 중국에 왕래하던 우리 나라 사신들을 통하여 서양 문물이 전해졌다. 이 때에 전해진 대표적인 서양 문물은 세계 지도와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의 과학 기구, 그리고 천문, 역법, 지리, 종교에 관한 책 등이었다.자명종천리경한편, 표류해온 서양인들도 있었다. 인조 때에는 네덜란드 사람 벨테브레 일행이, 효종 때에는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한 일이 있었다.하멜 기념비(제주도 남제주군)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을 통해 도입한 서양 문물과, 표류해 온 서양인들을 통하여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보다 더 넓은 세계, 그리고 중국 문화뿐만 아니라 다른 새로운 문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고 연구하려는 새로운 기운이 일어났다.실학을 깊이 연구한 이익은, 누구보다도 서학에 대한 관심이 커, 천주실의 등의 한역 서학서를 읽고 서양 문물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깊이 하였다.천주실의이익의 서학 연구열은 그의 여러 제자들에게 이어졌다. 이익의 제자들은 스승의 영향을 받아 서양의 과학 기술, 그리고 윤리와 종교에 대한 책을 구해 읽기도 하였다. 이에 이르러, 서학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하나의 학문으로 연구되었다.서학을 연구함에 따라,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중국 문화만을 높이 여기던 생각이 흔들리게 되었다. 지리에 대한 지식의 확대와 함께 과학과 기술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리면서 의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미술
미술 이미지
Q.  왜 이태백을 시선이라 부르고 두보는 시성이라 부를까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선 이태백(701~762)은 본명은 이백, 자가 태백입니다. 두보와 함께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되는 그는 현재 1,100여 편의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이들의 시에는 도가적 색채가 짙기 때문에 그는 '시선(詩仙)'으로도 불립니다. 어렸을 때 고향인 사천성에서 지내다가 25세 때부터 천하를 주유하며 다녔습니다.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도가적 성향도 이러한 자유분방한 방랑생활에서 길러져 나온 것이라 할 수 있겠죠.43세 때에 현종 황제의 부름을 받고 수도 장안에서 몇년동안 지냈으나, 그의 성격상 궁정의 번잡한 생활은 맞지 않았고, 다시 방랑을 하게 됩니다. 이시절 그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인물이 바로 두보입니다. 이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방랑생활을 계속합니다. 그가 강위에서 술을 마시다가 달 그림자를 보고 달을 잡으려다 빠져죽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는 진실이라기보다 그의 도가적, 낭만적 성향을 잘 드러낸 것이라 하겠지요. 그의 작품으로 청평조사(淸平調詞)가 대표적입니다.두보(712~770)는 자는 자미, 호를 소릉이라 쓰는 사람이며, 이백이 시선이라 불린 것에 대해, 그는 유교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시성(詩聖)'으로 불립니다. 하남성 공현 태생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생몰연도에서도 알수 있듯이 이백과 거의 비슷한 시대의 사람입니다. 당시는 '개원의 치'라 불리는 당의 중흥시대로부터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당나라가 급격히 쇠퇴해가는 과도기였습니다. 때문에 그의 시적 배경 역시 이백과 마찬가지로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이었습니다.두보는 젊은 시절 과거시험에 지원했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각지를 방랑하다가 이백 등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방랑생활을 했어도 그는 조상이 두예, 두심언 등 왕조 개창의 공신들이었고, 그런 까닭에 유교적 정서를 버리지 못했던 듯합니다. 때문에 그의 시는 이백의 시와 달리 유가적 입장에서의 치국, 평천하의 소망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불우하여 양자강 유역을 주유하다 끝내 배안에서 병사했습니다. 그의 작품으로는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약 1,400여 편의 시가 현존하고 있으며, 유가적 성향이 강했던 까닭에 이후 유교사상을 중시했던 우리나라의 시단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311312313314315
아하앤컴퍼니㈜
사업자 등록번호 : 144-81-25784사업자 정보확인대표자명 : 서한울
통신판매업신고 : 2019-서울강남-02231호개인정보보호책임 : 이희승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서비스 이용약관유료 서비스 이용약관채널톡 문의개인정보처리방침
© 2025 Aha. All rights reserved.